4. 흩어지는 세계
우린 학력고사라는 입시를 치렀다. 나는 백경 덕분에 수학에서 선방할 수 있었다. 우스꽝스럽게도, 가장 약한 과목 덕택에 입학 우수자가 된 것이다. 백경 녀석도 서울의 명문대로 진학했다.
입학과 더불어 학내는 시위로 시끄러웠다. 빈 시간이면 우리는 시국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면서도 사복형사의 첩보 활동에, 목소리를 낮추곤 하는 것이다. 나도 시위에 몇 번 가담해 봤지만, 친한 녀석 하나가 곤욕을 치른 후로는 몸을 사리게 됐다. 온 몸을 던지는 학우들도 있는 데, 그저 속으로만 응원한다는 비겁은 내내 무거운 변명으로 남았다, 입대는 현실 도피처가 되었지만, 복학 후에는 진로가 다시 목을 죄기 시작했다. 고시 공부를 걷어치운 후, 9월쯤 되니 각자는 길을 찾아가고, 나도 그 속에 끼게 되었다. 직장은 사실상 백지이므로 실수는 잦고, 그러다 보니 충돌이
일어났다. 이러다가는 신입부터 딱지가 붙을 판이다. 그런 차에, 본사 어느 업무에 관심 있는 직원은 지원하라는 공지가 떴다.
“잘된 일이다. 이 촌구석에서 이럴 바에야 차라리 상위 레벨에서 일해보자.”
나는 주저 없이 그 부서를 지원했다. 다행히 새로운 일은 적성에 맞았다. 그간 바깥은 민주 세력이 부상하는 변화를 겪고 있었다. 그 오랜 시간을 지나 민주화되었을 즈음, IMF 구제금융이라는 또 하나의 시련이 덮쳤다. 갑자기 미래가 불안해졌다. 그것은 단지 경제적 충격을 넘어, 세상을 쪼개고 잉여 인간을 만드는 사건 같은 것이었다. 세계의 벌어진 틈새로 침입하는 진실 같은….
세상은 그렇게 조용한 날 없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결혼 청첩장을 받았다. 녀석은 사법시험에 떨어진 날 그 밤을 비디오방에서 지샌 친구이다. 우리는 서로 격려하면서도 앞날이 두려웠다. 이 공부를 계속할지, 다른 길을 찾을지 고민스러웠다.
“야, 일어나라! 아침이다. 집에 가야지.”
“응, 그렇네. 가야지….”
간밤엔 취기로 용기백배였지만, 아침이 되니 가슴 속에 돌덩이가 하나 들어앉은 것 같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빗방울처럼 서글픈 미래도 흘러내렸다. 녀석은 졸업 후에도 그 공부를 계속했지만, 결국엔 변호사 사무장으로 돌아섰다. 그 탓에 늦 결혼을 하는 것이다. 나는 터미널에서 택시를 잡았다.
“누가 결혼을 하나 봐요?”
“네, 제 고교 친구가 결혼해요.”
“좋을 때입니다. 어렵다 해도 결혼을 해야 안정이 되지.”
결혼해서 안정될지, 안정되어서 결혼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택시는 막히는 길을 이리저리 돌아 예식장에 닿았다.
“야 오랜만이다. 이런 일로 얼굴 한번 보네.”
“넌, 성남에 산다며? 분당 신도시가 어쩌고 하는 데, 너도 거기 분양 신청했냐?”
“아니, 거기에 살 것도 아니고, 다시 내려와야지.”
“일부러 서울 근처로 가기도 힘든 데 한 번 자릴 잡아보지 그러냐?”
우리는 테이블에 앉았다.
“그나저나 너희들, 콘테 이야기 들었어?”
“응? 그 깡패 선생이 왜?”
한 친구가 그의 이름을 말하자, 가시 같던 그가 떠오르는 것이다.
“콘테가 식물인간이 되었다는 것 아냐. 글쎄!”
“엥, 무슨 말이야? 아직 쓰러질 나이는 아닌데….”
“글쎄, 얼마 전 졸업생 몇이 술에 취해 그의 집을 찾아갔나 봐.”
몸싸움 중 콘테는 계단에서 굴러 머리를 심하게 다쳤다는 것이다.
참 묘하다. 마치 권위주의와 억압이 땅바닥에 쓰러진 것 같으니.
“백경도 수모를 당한 일이 있잖아? 녀석도, 못잖게 적개심을 가졌을 텐데….”
서로의 공간이 바뀐 탓으로 나는 그도 잊고 지냈다. 그는 부잣집 아가씨와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산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머리를 타고난 것도 운이지만, 어쨌든 그는 자력으로 그의 세계를 펼쳤다.
“아마 처가 사업을 물려받을 거라던 데…. 외동딸이니….”
“선천적 머리에 처가 덕도 함께! 어떤 놈은 다 갖네! 다 가져….”
그렇다. 허덕거리고 헤쳐 나갈 동안, 그에게는 세계가 절로 다가오는 듯한 느낌이다.
“거기에 비하면 쏘가리 놈은 어떻고?”
“걘 또 무슨 일인 데?”
“머리는 나쁜 게, 부모덕으로 사업을 했다나?”
“그런데 패거리들과 도박판을 벌인 모양이야.”
“그러다 오히려 빚을 졌지. 필리핀인가에서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나? 몇 년 피신 끝에 자살했다는 소리, 동남아 어디로 잠적했다는 이야기….”
그간 나는 딴 세계에 살았던 걸까? 나의 구경꾼은 분열된 나 외에도 숱한 것이었다. 마치 고립된 세계가 가라앉으면서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기분이듯.
“안녕하세요. OO 실 xxx입니다.”
“여보세요! 저는 백경이란 사람인데, 혹 xxx와 통화할 수 있을까요…?”
수화기 너머 귀에 익은 목소리다.
“백경? 어떻게 내 연락처를 알고?”
“xxx 맞구나! 아니면 어쩔까 싶었는 데,,,”
놀랄 일이었다. 그가 어찌어찌해서 연락을 다 하다니!
그는 며칠 전 귀국했다는 것과 한 번 봤으면 싶다는 것이다.
“알았어, 그럼 이따 저녁에 봐!”
퇴근 시간이라 시내는 차량과 사람들로 분주하다. 약속지로 향하는 마음도 덩달아 바빠졌다.
“여기!”
녀석은 공백을 넘어온 듯 예전보다 더 날렵하게 보인다. 우리는 곧장 술집으로 옮겼다. 주거니 받거니 하던 그는 잠시 말이 없다. 필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는 잔을 몇 번 더 들이켜더니 마침내 말을 꺼냈다.
“아내가 예전 애인을 만나는 것 같아”
“Jacob이란 친구가 호텔에서 봤데. 사업땜에 아내에게 소홀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게 불륜을 정당화하는 건 아니잖아?”
“그래. 하지만, 차라리 잘 되었단 생각도 들어. 처가에 섞이면 마치 집사처럼 느껴지거든.”
“그럼 이혼이라도 하게?”
“애도 없으니 한결 낫지. 그래서 내가 해방되려고.”
“그럼 이혼 후엔?”
“아직은……. 다만, 내 꿈은 화가였어. 그 배고픈 걸 할 엄두가 안 났지만 말이야.”
“그림이라? ”
“어쩌면 나는 스스로 세상을 본다고 착각해 왔는지 몰라.”
“그런데, 난 시늉만 하고 살아온 것 같아”
“타인은 의식하면서도 정작 스스로는 꺾어 버린 것 같아.”
그간 그가 감당한 껍질의 무게가 얼마였을까?
“한결같지 뭐. 너만 그런 건 아니잖아”
“그래서 그 한결같은 곳으로 되돌아가려고.”
그는 미술을 시작했다. 아마 자신으로 가는 중일 것이다. 시간이 더 지나봐야 알겠지만,
관객은 배우를 본다. 그걸 연기자가 구경한다. 그 장면을 카메라로 촬영한다. 영상은 모두를 포착한다. 정작 촬영자는 바깥이다. 카메라는 관객의 눈으로 연극을 보고, 배우는 카메라로 관객을 본다. 그것은 3자의 눈, 그들을 지켜보는 대상의 시선이다. 모두가 보았다고 하지만, 실은 누구도 못 본 것이다.
“글쎄요? 파란 재킷이었는 데, 가로등이 어두워서….”
“아니 바로 앞에서 봤다면서요?”
“그랬는데, 지금 생각하니,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하필 사각지대에서!”
백경은 붓으로 거리를 재듯 이리저리 움직인다. 호수에는 그림자가 비쳐있다. 지나가던 어린애가 신기한 듯 바라본다. 백경은 고개를 돌려 그 애에게 미소 짓는다. 엄마가 가볍게 목례하면서, ‘아저씨 방해하면 안 돼’하면서 조심스레 지난다. 나는 창가에 서서 백경의 그런 모습을 사진에 담는다. 살랑거리는 바람이 시원한 오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