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user-scalable=no, initial-scale=1.0, maximum-scale=1.0, minimum-scale=1.0, width=device-width"> 내 이름은 명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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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예

내 이름은 명태

by canmakeit62 2024. 11. 7.

할아버지가 이상 기상을 피해 동해를 튀어나온 이민3세대이다 살아 할아버지는 그 고향 바다를 그리워

하였다 했다

함경북도에서 이름을 짓고 동해 바다를 유영했다

그러던 것이 수온이 올리가 그만 북태평양으로 이민을 갔다.

우린 차갑고 시원한 물이 좋다.

그런데 오호츠크해에서도 베링해에 사는 동포도

점점 살기 힘들어졌다.

빙하와 만나던 바다도 우리에겐 점점 뜨거워졌다.

어느날 빙산보다 더 큰 배가 나타났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더니 큰 그물을 펼쳤다.

"그 속으로 들어와! 너희들이 좋아할 만한 차가운 곳으로 데려다 줄게!"

바닷물은 미지근하다. 냉철한 우리에겐 더 차가운 물이 필요하다.

"애들아! 고향 바다처럼 시원한 곳으로 데려다 준 데"

"정말?"

품에 안기듯 그물은 우릴 감쌌다.

퍼득거리는 순간도 잠시, 잠이 들듯 차가운 냉동고에 몸을 눕혔다. 여러 명태와 좁은 방에 들었지만

몸이 편안하다.

"얼마만 지나면 더 넖고 더 시원한 곳으로 옮겨준 데"

다시 거슬러 왔던 태평양을 횡단한다. 가는 동안 불편하지 않게 어부는 수시로 얼음을 채워준다.

"이 정도 고생쯤이아!"

정신을 차려보니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내 몸을 둘러싼 비닐 랩에는 수식어가 덧붙었다.

'북해산 명태 5,500"

할아버지 고향에 와서 이름이 바뀐 것이겠지

"뭔 명태가 이리 비싸?"

푸념하는주부에게서 선택받는다.

가로57 세로45cm 냉동고에는 벌써 다른 종이 들어차 있다

"너희들은 이름이 뭐고 언제 들어왔어?"

"그렇구나, 난 알래스카에서 왔어! 앞으로 같이 지낼

테니 잘 부탁해!"

캄컴한 곧에서는 비좁긴 해도 시원하다.

그런데 옆과 위아래에서 함께 지내던 동료들이 하나씩 나가고는 돌아오지 않는다.

동료들에게 물어봐도 사정을 모른다.

"여기보다 더 좋은 데로 갔나?"

"오늘은 명태국을 끓여 볼까"

바깥에서 내 이름을 부른다.

드디어 나도 더 넖고 편안한 곳으로 옮기는 가 보다.

"여기도 좋긴 한 데 생각보다는 많이 추워!"

주인 아주머니는 친절하다. 그간의 한기를 배려해

따뜻한 싱크대 위에서 몸을 녹이게 한다.

이젠 거꾸로 추워서 잠 못자던 것이 스르르 몸이 폴린다.

잠시 후에 옴이 뜨겁다. 살갗을 댈 정도로 너무 뜨겁다.

"너도 왔구나!"

대파도 무도 함께 누웠다.

"이게 뭐야? 난 좀 따뜻하기만 하면 되는 데"

'북해산 명태'

'명태국'

수식을 받던 내가 이제는 수식어가 된다.

시적 언어는닳고 닳아 조탁한다고 해도 더 이상 실재에 접근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래서 차라리 그것을 더 이상 쪼아대지 않고 뭉툭한 채로 접근해 보기로 했다. 그러면 새삼스럽게도 덜 손질한 것이 보인다. 더욱이, 사물을 말할 때는 그속에 들어가 보지 않고는 피상적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그 속을 들어가 봤다. 명태는 잃어버린 동해를 꿈꾸었지만, 어디에도 그의 근원은 없는 것 같다. 늘 수식어로만 존재하든 이 사물은 그 자신의 회복을 꿈꾸나 그렇지 못하다. 존재는 절멸할 때는 절대적 절멸이다. 옆에 누운 양파, 쑥갓이 함께 사라져도, 자신에게서만은 절대적이다. 동료들이 더불어 사라지는 것은 어떤 위안도 아니다. 우리 존재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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