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user-scalable=no, initial-scale=1.0, maximum-scale=1.0, minimum-scale=1.0, width=device-width">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 최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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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예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 최은영

by canmakeit62 2024. 9. 24.

 

어떤 빛일까?

작가의 빛은 어떤 것일까?

단지 특정 부분만 비추는 집중 조명일 수도 있고, 날씨가 흐린 탓에, 전체를 다 비추지만, 광도가 낮아 희미하게 비치는 경우일 수도 있다. 혹은 사위를 다 밝히지만, 너무 강해, 오히려 주변을 온통 fade out 처리한 것 같은 빛일 수도 있다. 하이라이트같이 한 부분만 조명하는 것은 무대의 연기자들만 비추고 부속 장치를 보이지 않게 하듯이, 다른 사물과 사태를 삭제해 버린다. 이에 대해 그것이 여린희망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그것은 희미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엄청 밝은 것이다. 탄광에 매몰되어 갇힌 광부에게 무너진 돌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은 생명줄이다. 그것에 의존해 목숨을 구하는 굵은 동아줄 같은 것이다. 그러나 너무 강한 빛은 역설적으로 시력을 차단해,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한다.

아주 흐릿한 빛은, 밝지는 않지만 그래도 주변을 분별할 수 있게 한다. 단지 뚜렷이 비추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작가가 어떤 의도로 작품을 구상했는지는 그 내용을 읽기 전에는 자세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제목이 암시하듯, ‘아주 희미한 빛이라도라는 양보 구문에서(그것이라도 있으면 세상은 살 만하다)라는 말이 생략된 뜻으로 읽힌다. 그러나 그것은 달리 읽을 수도 있는 것이며, 새로운 시각을 던져 줄 수도 있다. 또한, 그 빛은 나에게도 가까이 있는, 인식하지 못하고 지내는 빛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나는 이 빛이 이루는 궤적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어떤 빛으로 비치는지 따라가 보기로 한 것이다.

 

2. 책 속으로

이 글은 몇 개의 에피소드를 통해 수필처럼 담담하게 일상을 엮어 나가고 있다.

개략적으로 보면, 여성에 대한 편견 등 차별적 현실에 순종적인 화자를 등장시킨다. 그에 맞서는 저항적이면서도 주체적 삶을 던지는 대화자는, 주체에게 본래적 삶을 살라는 빛을 던진다. 내면의 타자를 끄집어내고, 바깥의 자신을 마주한 주체는, 종국에 가서는 타자와 공감한 종합을 이뤄내고자 한다. 그것은 서로에게 빛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타자를 공감함은 사랑(가족 간의 사랑이 근저에 있는)이라는 결론에 이른다작품의 전반적인 흐름은, 주인공과 마주 보는 상대와의 대립 구도로 구성된다.

나약해 보이는혹은는 현실 순응적이지만, 그 상대는 이런 차별과 억압에 과감히 맞서는 성격으로 그려진다. 저항적이면서도 주체적 삶을 살고자 하는 타인을 투입하면서 화자에게 비본래적 삶에서 벗어나기를 유도하는 빛을 던진다.

처음에는, 대면한 상대방이 현실에 타협하면서 절제하는 삶을 사는화자에게 주체적 삶으로 이끄는 어떤희미한 빛이 된다. 그러나 그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가 빛이 되어 비춘다. 그래서에서처럼, 정연이라는 모임 선배가 해진과 희영의 중간자 역할을 하다가 마침내 그 둘로 분열한다. 그러나 전 작품을 통해 보건데, 그것은 대립자들간 파열이 아니라, 마침내 통합되며 서로의 빛을 통해 서로를 비춘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라도에서 강사가 나중에 그 일과는 멀어진 평범한 사람으로 퇴장한 것 같지만, ‘라는 새로운 인물로 교체되지 않았는가?

결국, 세상의 대립은 빛의 종합으로, 차이가 있는 반복으로 갱신된다.

 

그리고는, 그간 잊고 있던 내면의 타자를 끄집어내고 바깥의 자신과 마주한 화자는,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며 하나가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을 포용하는 사랑, 그것이아주 작은 희미한 빛아니, 조용한 완성을 이루게 하는 매개자인 것이다.

 

̏자기만의 언어도 없는, 반격할 힘도 없는 인형이었으니̏ ̋  [희미한 빛이라도, 16]

̏매 맞아 죽은 여자들을 위한 위령제에서 손잡고, 주제 선정 회의에서는 예전 처럼 입을 다물고 있지는 않았다 [, 65]

̏자기 앞에 있는 사람이 나라고 여겼는데 알고 보니 처음 보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은 것처럼 ̋ [답신, 166]

̏자기 상처에 매몰되어 다른 사람의 상처는 무시하고 별것 아니라 얕잡아 보는 편협하고 어두운 인간이 될까 봐. [이모에게, 255]

̏둘의 이야기는 서로를 비췄다 ̋[일 년, 123]

 

(1) 대립이 아닌, 종합으로 만나는 서로의 빛나는 사람들로부터,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그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

거나 추상적인 글로 옹알거림에 가까운 글을 쓴다는 평을 자주 듣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타인에 대한 공감성도 없으면서 내 이야기만 지껄이고 있던 것이다. 우리 세대에서 빚어진 용산에서의 비극은, 이런 오늘날의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이었음에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저 보상금 증액이나 늘리려는 불법적이며 호모 사케르 같은 삶을, 비슷한 처지에 있던 희원의 가족조차도 남의 이야기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폭력적으로 떼쓰는 사람들의, 강 저편 이야기 정도이며 저녁 식사의 또 다른 반찬 정도로만 여기고 있던 것이었다. 각종 가정 폭력이니, 비정규직의 불안함, 여성으로서 감내해야 할 것 같은 차별도 주인공의 성격에 묻혀 가라 앉아 있던 것이다.

 

̏살아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살아진다. 그러다 보면 사라진다   [일 년, 108]

 

수전 손택이 말하듯이,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며, 우리 특권이 그들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심사숙고해 보는 것 ̋[̒ ̒타인의 고통중에서]을 외면하고 살아왔던 것이다.

 

(2) 내면의 타자, 바깥의 자신

심중에 와 닿는 것이 있다면, 여성적 보편성에 관한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그의 저서에서, 남성적 보편성은 예외를 봉합한 전체성dl라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의 중심을 향해 통합하다 보니, 개략적 합일을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예외를 욱여넣은 것으로, 폭력적인 속성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본 작품을 통해서도 가정 폭력이라든지, 여성 차별, 빈곤층의 고통 같은 게 나타나지만, 주인공이 일부러 버스를 타고 우회해 비껴가는용산 터일제 총독부, 미군 주둔지, 그리고 최근의 참사로 상징되는 보편 폭력의 가려진 그늘이 되고 있는 것이다. 빛이 통과하지 못해 희미한 그늘을 만들거나, 오히려 강하고 폭력적인 빛으로 윤곽조차 보이지 않게 만들어 버린

곳이다. 그러나 그 희미한 빛이 반사되는 곳만의 윤곽을 드러내기보다는, 보이지 않는 곳을 보게 하는 또 다른 이면의 작용도 있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서 종합적으로는, 이 연약해 보이는는 비록 희미하지만, 큰 빛을 내는 존재이다.‘에서는 당신[이름은 해진이라 되어 있다]으로 불린다. ‘’=‘해진’=‘당신’=‘you’는 상대방이 나를 부르는 이름이다. 작가는 이런 복선을 도입했다고 생각한다. ‘당신’=‘you’인 데 ‘you’당신이라 지칭한다. 그것은 결국 분열된 자아가 종합하는 것이다. 내면의 타자가 자신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고, 바깥의 자신은 타인으로 분신해 마주 보는 것이다. 이 점이 마침내 모든 것을 하나로 집약하는 것이라 보인다. 그리하여 타인의 고통이 곧 나의 것이며, 그래서 공감하고 타인을 이방인으로 규정하는 보편 폭력에 맞서는 빛을 투사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사회적, 국가적, 개인적 폭력과 억압은 계속되고 있다. 저 멀리 중동이나 크리미아반도에서 진행되고 있는 전쟁, 아프리카의 배고픈 일상이나, 난민 보트에서 죽어 간 어린 아기, 약물에 짜든 재벌 3세에게 유린당한 여성 이야기는 그저 카페에 앉아 음미하는 가십거리일 뿐이다. 빛을 비춰 드러낸다면, ‘내 일이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정도일 것이다. 그들을 우리는 희미한 빛으로라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3) 공감과 사랑이라는 궁극의 빛

우리는 어떤 희미한 빛이라도 그것이 생명줄 같은 역할을 할 만한 걸 갖고 있을까?

우리가 좇아야 할 빛은 어떤 것일까? 하이라이트가 되어 사물을 뚜렷이 비추기도 하지만, 때로는 빛이 통과되지 못해 보지 못하는 것을 제대로 보고, 아파해야 한다는 메시지도 동시에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의 빛을 다시금 깊이 생각해 봐야 하겠다. 자격이 없다고 주춤거리며 늘 자신을 철회할 때, 세상은 그대로이다. 빛은 주춤거리지 않는다. 그래서 저자는 역설적으로 희미한 조그만 빛이 가장 큰 빛이 될 수도 있음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그것은 공감과 사랑이라는 궁극의 빛일 것이다. 특히 가족이라는 빛은 희미할 지라도 더욱 빛나는 것이다. 소외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아픔을 공감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마음속에 스며드는 것이 아니라, 피부의 겉에서 느끼는 감각작용일 뿐이다. 그래서, 희미한 빛은 비록 작지만, 심성을 비추는 빛인 것이다. 자신과 타인을 동일시함으로써 주파수를 증폭시키는 공감 대역을 형성하는 것이다. 자식과 부모, 진심 어린 친구, 사랑하는 사람들 간에는타산적인 관계가 개입하지 않는다. 사랑은 그 어떤 강한 무기보다도 더 힘이 센 것이다. 그것은 희미한 빛이라도 있으면, 살아갈 수 있는 가장 강한 빛이 되는 것이다.

 

̋별빛은 신의 눈빛이거나 더는 만날 수 없는 사랑하는 존재들의 시선이었다. 환한 낮이 아니라, 어두운 밤에만 지상에 닿은 저 너머의 눈빛이 있다는 믿음  [̒̒ ̒이모에게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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