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게 직업화되니, 윤리란 상호 공동체를 보존하는 고귀한 준칙이기보다는 자본주의 질서를 조율하는 또 다른 규칙 같다. 물론 윤리를 현실에 갖다 붙이면 그것은 변형된 십계명이기도 하다. 프로테스탄티즘이 자본주의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은 참 납득하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거기서 검약하는 정신 따위와 천국, 예정 조화설 따위를 빌려왔다는 것인 데 과연 그럴까?
아마도 자본주의는 자기증식하는 것이라 개신교 윤리가 제공한 기반이라면, 거래 이익을 남기는 도덕적 찜찜함을 정당화시켜 준 것이 아마 다른 모든 것을 능가할 것이다. 물론 그런 막후 스토리를 언급하는 것은 억지 거나 시대착오적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젠 그런 배경조차 잘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아니 그런 막후 이야기는 듣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이젠 직업윤리만 남는다. 그러니까 거래에 필요한 적절한 불문율만 유지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미약한 수준으로.
싸움을 하는 데에는 가친 신체적 역량이나 그를 압도하는 유려한 논리가 필요하다. 일반적 삶과 아닌 것을 구별하는 것은 겨우 그 정도이다. 그렇다면 서로 소통이 불가능할수록 매개자가 필요하고 그것은 직업화되기 쉽다. 그 정도에서 일반 생활과 분리된다. 여기에 윤리가 개입한다면, 이런 점을 밝히고 대리 행위이든 무엇이든 수행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내부에서 처리할 규칙 정도로 삼는 것이 현실화하는 것 같다. 윤리적 직업까지는 바라지 않아도, 직업윤리가 제 모습을 찾아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