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user-scalable=no, initial-scale=1.0, maximum-scale=1.0, minimum-scale=1.0, width=device-width"> 침묵하는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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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예

침묵하는 저항

by canmakeit62 2024. 6. 13.

 

1. 가끔씩 70년대 이전의 국내 소설 작품을 읽어 보면 주제는 비슷하다.

매일이 반복되는 일상에 대한 권태로움, 목소리 강도는 다르지만 억압에 대한 소리 없는 저항 같은 것이다. 무기력한 삶이야 시대를 떠나 항상 똑같은 삶이 펼쳐지니 그렇다 치고, 여전히 억눌린 삶은 되풀이 되는 것일까? 

따지고 보면 저항 문학이 아닌 게 없을 지경이다.

그 범위가 넓어져 소수의 문제가 빈민, 약자에서 젠더, 인종 등으로 확장된 것이다. 그 수 많은 역사 속에서 지배와 피지배는 해결 불가능한 불가피한 내용으로 확장되는 느낌이다. 세계를 양분해 그 대척점에서 균형을 찾아가는 것이 삶이다 보니 자연 그러해 보인다. 이 도달 불가능한 문제는 인간이 존속하는 한 계속될 것이다. 비단 사람만의 문제이겠는가?

길냥이에게 먹이를 주는 광경에서도 이런 모습을 목격했다. 먹이를 그릇에 담아주고 캣 맘 나름의 이름들을 부르지만, 힘이 약한 녀석은 뒷편에 쪼그리고 앉아 자기 차례를 기다린다. 이 서열은 자기 무리 내에서 이뤄지겠지만, 무력을 통한 평화를 구성하는 방법일 것이다. 이런 자연의 습성은 사람에게도 달리 표현되는 건 아닐 것이다. 

 

2. 역학적 과정에 따라, 강한 힘을 가진 사람이 많은 몫을 차지한다.

고양이에게 서열이 있는 것은 우두머리가 다른 무리에게서의 침입을 막고 자신이 이끄는 집단을 보호해 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일 것이다.

사람에게는 이것이 좀 달라 보인다. 획득은 능력에 의한 것이고, 이런 의무 따위야 가지고 힘센 사람의 은혜로움 정도로만 생각한다. 내가 더 가진 만큼 의무도 강해지는 것에는 다소 의문이 드는 것이다.

힘과 소유는 자신을 방어하는 일에 더 크게 작동한다. 조선시대나 그러했을 것이다. 삐딱한 시선으로 보면, 그 당시에는 흉년이나 기근이 들었을 때에는 천석꾼, 만석꾼이 곳간을 풀어 마을 사람들 구제에 나섰다고 한다. 진정 어린 선행을 보여 주던 이도 있었겠지만, 굶주림에 낫을 들고 침입할 마을 사람들을 미리 달래고, 다음의 노동력을 유지하기 위한 불가피한 행위였다. 하루 아침에 동일한 나락으로 떨어지고 처참한 피해를 당하기 전에, 가진 것을 풀어 헤치는 게 훨씬 현명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길냥이들이 하는 행태와 많이 닮았다. 

 

3. 이런저런 유래를 떠나서, 헌대적 삶은 위험도 자기 부담으로 짊어지고 사니, 방어 수단이 부족한 사람들은 제 한 몸 지키기가 몹시 힘들다.

암묵적인 사회적 약속은 내용을 잃고 말았다. 국가권력이 그것을 대신한다고 하나, 권력자를 보호하는 한도 내에서 일 뿐이다. 국가 기반의 최소 단위를 확보하는 수준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사법 불신이니, 공권력 불신이니 하는 말이 새삼스러운 건 아니지만, 그런 것들이 임의의 사적 권력이라는 기형을 낳는다. 이미 법원이나 감옥, 처벌 따위는 개인 공간으로 옮겨갔다.

의도의 순수성을 의심할 밖에 없지만, 투사나 영웅, 저항하는 몸짓은 엉뚱하게도 이들에게 옮아갔다.

이제는 먹이 순서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엎어 버린다. 자신의 보호는 자기에게로 이양한다.

두려움에 찔끔거리며 곳간을 열기 전에, 이미 그 열쇠를 확보해 창고를 열어 버린다. 예전의 억압은 강한 힘으로 눌러 순응하게 하게 하는 것이었다면, 지금은 복종에 대해 방임하는 것이다. 자기를 가르치는 교사를 폭행하더라도, 사건을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부작위의 현실이 억압으로 바뀌는 것이다. 먹이 순서를 기다리라는 힘, 곳간을 더 채우기 위한 강한 역량은, 보호책을 잃은 집단, 질서 행정에 협력해야 하는 다수의 묵언으로 전환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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