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누가 뭐라 하지도 않는 데..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지친 다리를 좀 쉬게 할 요량으로 공원 벤치를 찾았다. 그런데 누군가 한 사람이 앉아 있다. 자리가 많아 보여도 갑자기 내키지 않는다. 앉을 곳이 많아 보여도 그게 다 빈 곳은 아니구나!
의자 하나하나에도 마치 익명의 이름표가 있는 것 같다. 아주 사적인 전화 통화를 방해받지 않으려거나,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무슨 일을 하려는 외에는, 낯선 사람과의 어색한 거리 외에는 거리낌을 느낄 이유가 없지만, 그렇다. 굳이 경계심을 세우고 거리를 둬야 할 특별한 이유가 없음에도, 다른 곳을 찾아 옮겨야 할지 쭈뼛거려지는 것이다. 심지어, 지금 괜히 옮기면 상대를 적대시해서 그러는 것으로 오인받을지도 모른다는 눈치까지 보게 된다. 거리를 두고 자리를 차지하기로 한다. 조용한 생각을 하기엔 글러 먹은 듯하다. 함께 그 공간을 차지한 사람은, 누구든 듣기를 바라는 것처럼 전화 너머로 자신의 신세를 토로하기 시작한다. 공원이라는 것이 오롯이 사적 영역으로서 보장되는 건 아닌 탓에, 개인사가 노출되는 걸 염두에 둘 수밖에 없다. 혼자서 억지로 어떤 서사를 상상하는 순간에, 그의 이러한 이야기가 나의 상념 속으로 비집고 들어선다.
2. 빈자리에도 이름표가 있다
"편하게 해! 나이 차이는 있지만, 형이나 아빠처럼!"
이미 사회적 제도나 관습에 의한 격차가 있음에도, 심리적 거리를 좁히라는 건 어찌 보면 논리 모순이다. 사적 영역이지만, 그런 것들은 공적 규칙처럼 행세한다. 그 양자가 중첩되는 지점에서는 편안한 마음 상태가 조성될 리 만무하다. 그럼에도 그 선언은 어떤 면죄부를 부여하는 것처럼 발화된다. 빈자리를 찾아 앉았지만, 노약자가 내 앞에 서 있으면 그 자리는 더 이상 내가 차지할 사적 공간은 아닌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세상을 사는 모든 일에는 이 익명의 자리표가 붙어 있다. 실명을 표시하면, 그것은 공적 역할을 수행하라는 메시지로 공표된다. 그렇게 보면, 순수 사적인 영역은 드물다. 심지어, 나 혼자 맘껏 드러눕는 방안에서도 마음속 타자가 자신을 제어한다. 옆에 앉아 말을 걸거나 길을 묻는 사람 말고도, 내 속의 타자마저도 익명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빈 곳은 없다. 공간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공기로 채워진다. 우리는 공기를 볼 수 없지만, 그것을 느끼기는 한다.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를 휘감고 있는 그 무엇이, 가득히 빈자리에 단 한 사람만 앉아 있어도, 앉을지 말지를 망설이게 하는 것이다.
3. 빨간불에 직진하세요!
드러나 외화 되는 것은 오히려 숨어 버린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예를 들면 관공서에 가서 무슨 일을 처리하다 보면, 자기들만의 암호 같은 고색창연한 전문 용어가 나돌고 이에 익숙하지 않은 방문객은 같은 일을 몇 차례 반복한다. 요구하는 쪽에서는 특히 주의할 점들을 재삼 강조하지만, 민원인 입장에서는 이 낯선 용어들을 단번에 흡수하지는 못한다.
"확인서 '일반'이 아니라, 확인서 '상세'라고 안내 메모에 줄까지 드렸는데요!"
맞다. 그런데 그걸 자세히 보지 않고 일반용이란 뜻이겠지 짐작하고는 자동 발급기 스크린을 누르고는, 뿌듯하게 민원 창구에 디밀었던 것이다. 헐레벌떡 행복 센터를 찾아 제대로 된 걸 재발급받아 다시 시도한 후에야 일은 종료되었다. 길은 처음부터 쭉 뻗어 있는 게 아니라, 곱은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정작 드러나는 것은 외형을 갖추어 공적 지시 등 역할을 하는 게 아니다. '확인서(상세)'처럼 괄호 쳐져, 마치 익명의 기호를 감추고 있는 듯하다. 현상학에서의 괄호는 개념의 실재를 추구하는 시도이지만, 현실 세계에서의 그것은 핵심적 차이를 부각하지만, 마치 올바른 방향을 은근히 감추며, "아니, 제가 형광펜으로 쭉 그어서 특히 유의하시도록 안내해 드렸는 데..." 하는 퍼즐 찾기의 출제자 같은 모습이다. 실명은 잘 보이지만 길을 엉뚱하게 지시하고, 익명은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지름길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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