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user-scalable=no, initial-scale=1.0, maximum-scale=1.0, minimum-scale=1.0, width=device-width"> 너무 잘게는 살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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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예

너무 잘게는 살지 맙시다.

by canmakeit62 2024. 4. 15.

1. 상상에서 만나는 거대 서사

웬 종일 걷고 헤매느라 몸이 피곤한 하루이다. 그래서 감기는 눈꺼풀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워 일찍 잠자리를 차지한다. 하지만 어찌 된 것인 지 쉽게 잠을 청하질 못하는 것이다. 머릿속 자체가 더 무거워야 할 것 같다. 그래서 그것을 더 힘들게 하기 위해 이런저런 상상을 해댄다. 콜레주 드 프랑스 아시아 학회 도서관에서 최근 발견되었다는 광개토대왕비문 탁본이 불쑥 화면을 채운다. 일본과 중국이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전면에 배치된 이 비문.

서기 391년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아니, 그 시기에 그 비문의 서사를 쪼아 대 비틀어 버린 것일까?

내 머릿속 상상에서는 광개토대왕께서 왜구를 격멸하고 지금의 일본 땅에 식민으로 삼은 백제, 신라, 가야 유민들을 통한 지배 정책이 꿈의 나래를 펼치는 것이다. 일본은 그래서 고대 이래 우리나라를 이토록 괴롭히는 것일까?

등에 벌레처럼 중국과 일본은 우리에게 참으로 성가신 존재들이다. 특히 일본은 고대 문화 형성 조력자로서의 우리를 힘들게 만드는 배은의 극치처럼 보인다. 우리에게서도 불리하거나 불편한 역사적 사실을 감추고 이를 그릇되게 기술한 면이 많음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고대 고구려나 백제 역사서가 모두 소멸되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그 기록들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좋은 방향이든 대하기 싫은 내용이든, 인위적 견강부회가 따를 수밖에 없다.

 

2. 겪어보지 않아도 안다고요?

사람들은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 보고, 또 도전적 삶을 지향해 고개가 갸우뚱한 모험을 시도한다. 불가능성의 대상은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자연, 심연에 묻혀 있는 근원, 신체 능력치를 넘어서는 활동 등 희소 사태라는 이미지에 비해서는 오히려 다양하다. 그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 모습에 직면한 보통의 반응은 그렇다. 대단하다고 하기보다는 무모하다고......

에베레스트는 거기에 오른 사람이 있어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주지만, 이제는 굳이 누군가가 체험을 나누지 않아도 그게 뭔지를 대략 알고 있다. 그럼에도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A 등산가가, B 산악인이 거기를 오르는 이유는 뭘까?

이 무료한 세상에 한 번쯤 반란을 꿈꾸거나, 그 사 높이만큼 세인의 큰 관심이 필요한 걸까?

아니면, 세속적인 영웅적 야망을 실현하고 싶은 걸까?

등반은 그렇다 치고, 행세께나 하는 사람들이 천문학적 비용을 들여 우주여행을 시도하는 건, 부러움을 넘어 질시와 비난을 받을 수도 있는 처사이다. 그까짓 달 껍데기를 한 번 딛겠다는 욕망은, 그 돈으로 지금도 굶어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건져낼 수 있을 텐 데......

 

3. 환상보다는 서사가 필요합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이 널리 퍼져있는 오늘이다. 예전의 거대 서사는 사라지고, 자신의 일상에서의 소소한 행복이 만족으로 다가오는 세상이다. 물론 우리는 과거 거대 서사를 추구해 오던 것에서 반휴머니즘적 과오를 많이 저질렀다. 인종학살, 식민정책, 패권을 위한 전쟁 등.

그런 거대 서사를 해체하고 인간으로서의 작은 모습, 주변을 둘러보는 자기반성 같은 것은 이 미시적 세계가 훨씬 더 지킬 만한 가치가 있음을 항변하는 것에 부족함이 없다. 그럼에도 삶은 작용과 반작용이 끊임없이 부딪히듯이, 이 서사 없는 삶이 무기력하기도 하다. 그것은 마치 '내가 좋으면 그런 것이지!'를 넘어, '남 잘되게 하고 언제 나 잘 사나?', '나 하나쯤이야!', '남이야 죽든 말든!'과 같은 이기주의나 극단적 개인주의처럼 새겨질 여지도 많다. 거대 서사가 필요한 부분은 바로 이런 시점이 아닐까?

내부로만, 좁은 영역으로만 쪼그라드는 이 미시적 삶은, 머리카락에 구멍을 뚫는 정밀함이지만, 정작 머리타래를 엮어 짚신을 만드는 것에는 무능하다.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것도, 심해를 탐구하는 것도 오르지 않고 다이빙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지만, 디지털로 연결된 이 작은 세계에서는 자신만의 서사도 필요한 것이다. 다만, 과시로서의 서사는 제외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