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줄거리
작품은 어느 불법 낚시꾼이 저수지에서 해주가 벗어놓은 가지런한 운동화 한 켤레를 발견하고는 자살로 의심해 경찰에 신고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해주는 그녀의 의심이 깊어지고 그래서 염증을 느끼는 연인 해록의 요구, 헤어짐을 조건으로 마지막 만남 장소로 그곳을 택했던 것이다. 그런데 해주는 어릴 때부터 비교적 여유있는 가정에서 자랐지만, 바쁜 부모들 탓에 늘 외로움을 느끼며 살았다. 이런 그녀에게 누군가 관심을 가져 주는 것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 욕망인 것이다. 그중 학교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해록은 그녀의 모든 것이다. 그래서 해주는 해록에게 병적으로 집착하면서 그의 마음에 드는 건 맹목적적으로 이행하는 한편, 자신으로부터 이탈할 관심사가 있으면 거짓, 농간을 부려 해체해 버린다. 이런 절대 소유 대상 해록에게, 해주는 약자이며 일방적으로 사랑을 구걸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해록은 내 것이어야 한다'는 것처럼, 존재보다는 소유로서의 사랑을 갈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해록의 실종 사건과 관련해 그녀를 심문하던 경찰에게서, 사실 그 모든 것은 해주가 가스 라이팅을 통해 주변을 자신 중심의 세상으로 구성한 허구라는 것으로 반전을 이룬다. 자신에게서 관심이 사라질 것을 두려워해 온갖 음모와 이간질, 타인의 죄책감 등을 이용해 주위 사람들을 포박하고 있던 것이다.
2. 뒤집힌 사랑
알랭 바디우는 그의 저서 '사랑 예찬'에서 사랑은 각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 말한다. 즉 사랑은 둘이 만나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와 하나가 만나 '고유한 하나'로 남는 것이라고 한다. 바디우는 우리가 흔히 말하고 있는 이 '당연한 것’에 무슨 의문을 가진 것일까?
둘이 만나 하나가 된다는 것은 일종의 폭력을 동반할 수 있다. 둘의 합일이라는 것은 어느 한쪽으로 통합함으로써 다른 쪽의 희생, 억압, 무시를 낳는다.
이 작품 전반에서도 해주의 허구가 밝혀지기 전까지 그녀의 일상은 오직 해록에게만 맞춰진 삶이었다.
그녀는 해록의 시선을 받을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오직 자신만이 해록의 눈 길을 받는 존재로서, 그녀가 만든 가공의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광기에 가깝게 주변을 속박한다. 그런 그녀의 외로움에 대한 환상 지탱물이 사랑인 것이다.
그런데 흔히들 사랑의 반대말은 '두려움, 무관심, 구속' 등이라고 한다. 그런 심리적 태도는 그녀의 성장 과정에서 겪었던 외로움이 사랑에서 어떻게 병적으로 전이되고 있는지를 반전이 있기 전 가스 라이터로서의 해주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한편 에리히 프롬은 ‘존재 양식과 소유 양식으로서의 삶’을 이야기한 바 있다.
여기서 해주는 해록을 사랑하는 것에 광적으로 집착함으로써 그를 독점적으로 소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해주 자신의 존재를 잃고, 오직 해록의 시선에만 집중함으로써 소유되면서 소유하는 '소유 양식으로서의 삶'을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은 경찰에게서 곰팡이처럼 퍼진 해주의 병리 현상이 폭로됨으로써 사랑의 반전, 현대인의 고독 따위의 실체를 드러내고 마는 것처럼 보인다.
3. 삶 자체 회복
그러나 여기서는 남녀 간 사랑과 그 분열상을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현대사회의 각종 병리 현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대는 소비사회이다. 주체가 무엇이냐는 공허한 논쟁 대신, 현실에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소비 주체가 되지 않으면 별 의미를 부여받지 못한다. 이데올로기기가 종언을 고하고 신마저 죽은 지 오래되는 마당에, 우리는 의지할 그 무엇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 공허함을 메꾸기 위해 환상을 갖는다. 어느 연예인·스포츠 선수처럼 화려한 조명을 받는 삶, 100만 구독자를 가진 인플루언서 등이 그 환영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의 주체성은 여기에 매몰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내가 존재하는 존재로서의 삶은 아니다. 부모 기대에 부응하는 삶 등과 같은 타자의 삶을 사는 것이다. 남보다 더 날씬하다든지 더 큰 경제력을 소유하는 것처럼 끊임없이 타자의 응시를 의식하고 사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 불일치에서 갈라진 틈이 생길 수밖에 없다. 달리 표현하면 우리는 내용 없는 ‘기호’에 둘러싸여 산다. 누군가의 품격은 그가 어떤 책을 읽었느냐보다는, 어떤 명품을 갖고 어떤 주택에 어떤 사회적 지위를 가졌느냐 등에 의해 좌우된다.
이것은 소비사회의 기호 역할, 어떤 고정된 질서에서의 이데올로기로 강화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우리는 ‘당연해지면 볼품이 없어지지만, 당연한 것을 벗어나면 삶이 붕괴’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사람은 삶을 지탱하고자 환상을 가진다. 그것이 없으면 삶의 종결, 그러니까 해주가 해록을 저수지로 이끄는 계기 같은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경찰이 해주의 허위를 폭로하듯 환상을 횡단해야 한다. 물론 현실 사회는 인간이 언어나 다른 상징체계를 이용해 구성한 가상이니 환상을 가질 수밖에는 없다. 예를 들어, 집합주택이란 건, 현상적으로 수십 층 솟아 있으며 각층은 개인 재산이 된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합의된 환상이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
그런데 그것이 자연재난으로 무너진다면?
각자는 겨우 공유지분 중 조그만 땅 조각이나 몇 줌 흙만 거머쥘 수 있을 뿐이다. 허구가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이면으로 말하자면, 환상이 없으면 아파트 같은 제도는 지탱하기 불가능하다. 그래서 환상이 일정 부분 현실을 떠받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맞다. 문제는 그것이 과잉을 빚을 때는 온갖 사회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환상을 횡단하자는 것이다. 타인에 맞추는 일은 관습, 타성화되는데 이게 당연한 것은 아니다. 그런 삶은 존재 양식을 상실하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흘러넘치는 당연시되는 삶을 둘러 봐야 한다는 것이다.
작품에서 해주는, 자신이 딛고 있던 거짓된 삶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녀가 살았던 타자의 삶은 고스란히 그들 타자에게로 전가된다. 우리는 여기서 가벼운 역할이지만, 경찰의 결론으로 수렴되는 해록의 친구들, 해주 엄마의 사회적 거울 역할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 곰팡이가 번지지 않게 각성하는 내면의 반성적 타자들을 말이다.
그들은 전도된 사랑, 허구적 삶을 저수지에서 건져내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리하여 타인의 시선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에서, 자신의 언어로 말하며 타인의 저수지에 침몰하는 자신을 건져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바라보기’와 같은 교훈을 얻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