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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예

믿는다는 것을 믿습니다

by canmakeit62 2024. 5. 20.

1. 믿음과 믿고 싶음

믿음과 믿고 싶은 것의 치이는 뭘까?

대상을 향해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지만 믿음은 선험적이며 본질적이라는 뉘앙스가 있는 반면, 믿고 싶은 것은 후험적이며 인위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어떤 것이든 절대적 신념을 갖는다는 게 놀라운 현상이긴 하다. 세상엔 믿을 게 아무것도 없어 자신조차도 부정하는 마당에 말이다. 요즘은 '어디 마음 둘 데가 없어 '믿고 싶은 것을 하나쯤은 내세우고 싶어 한다. 그것이 물신화를 초래하는 전근대적 사고라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말이다. 그런데 근대성조차도 사실은, 인간에 의한 유토피아를 꿈꾸는 신화가 아닌가?

그래서 신화는 끝내 우리를 떠나가지 못하고 유령처럼 배회한다. 이 환상이 현실속으로 침투하면, 그것은 세계가 되기도 한다. 인간이 언젠가는 새처럼 하늘을 날 수 있다거나, 상어처럼 바닷속을 유영할 수 있다는 환상이 없었다면, 우리는 비행기나 잠수함 같은 것을 눈앞에서 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정신 분석학에서는 환상을, 현실의 지탱물이라고 한다. 그것이 없으면 세상이 광적으로 변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2. 믿음의 하강

그런데 흔히 정신병자는, 현실과 환상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광인에 이르는 단계를 초월해 끝내 현실에 붙잡아 두지 못한 걸까?

흔히 천재적인 예술가나 사상가는, 소위 제 정신이 아닌 때 폭발적인 힘을 발휘해 명작을 남긴다. 미치지 않고서야 그 층위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사유처럼, 이성과 비이성은 경계에 맞닿아 있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광적인 것은 이성의 최상위층과 닿는다. 자신이 무엇인지를 끝없이 회의하던 그는, "내가 미치지 않고는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느냐"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니 믿고 싶은 것은 믿음을 향한 극한적 접근이다. 믿음이 정상이라는 전제를 갖는 것이라면, 그것에는 과신, 오신 등의 부정적인 사태를 함께 갖고 있다. 아마 믿고 싶은 것은 이 층위에서 발견될 수 있을 것이리라 생각된다.

그래서 믿음과 믿고 싶은 것은 어감상 차이뿐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차이가 있을 것이다. 믿음이 점점 상실되고, 다른 물신으로 대체되는 동안, 믿고 싶은 것이 주류 자리를 차지해, 그것의 자리는 하강하고 있다.

3. 부정성 사이의 긍정성 확보

대신에 그 강도는 아주 유사해, 새로운 믿음 형식으로 기능한다. 일상 다방면에서 이런 우상은 발견된다. 여기에 대한 어떤 도전이나 이의 제기는, 목숨까지 걸어야 할 지경이다. 이 현실을 지탱하는 환상이, 다시금 부정성을 띠기 시작하면, 현실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기껏 구축한 그것이, 토대를 잃는다면, 무엇으로 삶을 꾸려 나간단 말인가?

삶은 온 곳을 모르고 갈 곳도 알 수 없는 부정성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데, 그 단층을 없애 버리면 현실 세계는 부정된다. 존재가 존재하는 바탕을 없애는 것은 모순이다. 차라리 믿고 싶은 것이라도 있는 게 낫다. 그렇지만, 그것은 변곡점을 지나 이성으로 넘어가는 지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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