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분노 조절 애로 사회
분노를 조절하기 힘든 삶이다. 세상을 향해 자신의 내면을 토해 내는 것이 일시적 파열을 내는 건 그래도 지나칠 만하다. 하지만, 그것이 누적된 혐오로 증폭될 땐 사태가 중대하다. 폭력을 비난하는 어느 글이 올라오면, 이번엔 왜 소수자에 대해서는 갖은 악의가 동원되면서 다수자에 대해서는 그토록 관대하냐는 것이다. 이리되면 출발선을 넘겨 성차별이나 인종주의 문제로 비화하고, 그것은 권력이나 기득권 등의 사태로 확산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식으로 비슷한 공감대가 연대를 이루다가, 그 속에서 다시 분열해 작고도 작은 관심사로 흩어진다. 공동체가 일반적인 공통체로 묶일 수밖에 없지만, 이는 매우 미시적 결합으로 세분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마을 공동의 과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모든 이의 합의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관행상, 의사결정 영향력이 어느 계층에 집중되고 대부분은 그 관례를 존중하는 식이었다. 그러니 내부 불만은 잠재적으로 봉합된 것일 뿐, 언젠가는 터뜨려질 성질의 것이었다. 하지만 공동체 무언의 억압이 이를 눌러, 일상을 지배하는 것이었다. 잠재된 이 불만은 만일 이웃 마을과 분쟁이 생겼을 때에는 가히 극렬한 변형으로 나타났다.
2. 숟가락도 무기가 된다
농촌에서의 농기구는 농사를 짓는 도구이다. 낫은 벼나 풀을 베는 일에, 도끼는 장작을 패는 장구이다. 그런데 유사시에는 이것들이 공동체를 지키는 무기로 전환했다. 고대 사회에선, 농사를 짓다가도 전쟁이 벌어지면 이것을 들고 대항했다. 그래서 농기구도, 심지어 화폐 역할을 하던 것도 무기로 전환해 사용할 수 있도록 제작된 게 많았다. 전시에는 화살촉으로 쓸 수 있도록 만든 버드나무 잎 모양의 유엽전 등...
혁명의 많은 경우엔, 농민들이 주도 세력이 된 경우가 많다. 경제적 수탈 뿐 아니라, 특권층의 횡포를 견뎌낼 수 없어 세상을 뒤집어 보고자 일어선 것이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 일 바에야, 세상을 한 번 뒤집어 볼 용기가 자연스럽게 주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어찌 보면, 순박해 보이는 이 사람들이 보다 과격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을 것이다.
3. 혐오의 밀도가 높아진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상당한 수준으로 해체되었다. 보편이란 이름으로 저미고 살던 억압이, 시간을 거듭하면서 풀려 나오고 있다. 여성, 성소수자, 인종, 소외 계층, 진보를 빙자한 환경 파괴 등.
그 밖에도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억눌린 많은 것들이 해방을 맞고 있다. 그런 사회적 집단 심리는, 혐오라는 세월의 축적물을 배설하는 플랫폼 기능을 뱉어 내고 있다. 잘 나가는 연예인 하나가 강남의 몇 백억 짜리 빌딩을 인수했다는 따위의 기사가 실리면, 그저 일상을 사는 사람들에겐 혐오가 들끓는다. 심지어, 기사는 그 혐오를 이용해 구독을 유도하기까지 한다. 억눌린 것의 상승을 보는 순간, 이번엔 동질감의 영역으로 그들을 소환하려 하는 것 같다. 새로운 형태의 균열이 발생하니, 그들을 끄집어 내려 수평을 맞추고자 하는 것일까?
오이디푸스 삼각형은 이런 경우를 보면 여전히 유효한 전망일까?
문제는 혐오가 바깥을 향해 표출되는 게 아니라, 내부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표현 형식이야 각종 흉악한 범죄 같은 외형이지만, 자신에 누적되는 내면적 극한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혐오는 더욱 만연한다. 모든 것을 자신의 능력 부족으로 몰아가는 사회 현상은, 이 견디기 힘든 억눌림을 분노로 드러낸다. 경계를 더 멀고 높은 곳으로 밀쳐낼수록, 혐오는 보다 더 큰 밀도로 다져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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