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user-scalable=no, initial-scale=1.0, maximum-scale=1.0, minimum-scale=1.0, width=device-width"> 열치매 드러나 ᄇᆞᆯᄀᆞᆫ ᄃᆞ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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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예

열치매 드러나 ᄇᆞᆯᄀᆞᆫ ᄃᆞ리

by canmakeit62 2024. 5. 3.

1. 솔직한 시대가 곡조를 감춘다

노래가 흘러나온다. 옛날 노래다. 내가 젊은 시절에 듣던 대중가요이다. 저리도 오래된 노래가 아직도 라디오 전파를 타고 방송되다니......

그 시간을 거쳐 온 탓인 지, 문득 감성이 과거와 접속한다. 요즘 사람들은 이 노래를 들으면, 속도가 느린 데다가 감정 표현이 오히려 직설적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가사는 뚜렷이 들리는 데다가, 심장의 표피를 긁어 댄다. 요즘같이 제 감정을 솔직히 드러낸다는 세대 노래에 비해서는 역설적이다. 작금의 대중가요는 따라가지도 못할 속도와 영어 속어를 뒤섞어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래서 오히려 느낌을 잘 드러내지 않는 것처럼 들린다. 음악 자체가 운율을 언어로 하는 것이니, 그 속의 가사야 굳이 전달 요소로 하지 않아도 이미 세계 공용어로 소통하고 있는 게 아닌가?

소리로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는 율동이 지배적이니, 격렬한 움직임이 따른다. 노래를 들으면, 과거의 아른하던 추억이 머릿속에서 뮤직 비디오를 만들던 것에서, 리듬, 몸 짓 언어, 시각적 영상이 동시적으로 눈 앞에 펼쳐져 상상할 시간을 갖지 못하게 한다. 듣는 이도 그 곡조에 가담해, 노래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일은 드물다.

 

2. 표피에서의 감정 표현

세상이 복잡해지다 보니, 메시지 전달은 순간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거기에다가 가뜩이나 주위에 시선을 줄 여유가 없으니, 마음을 적시기보다는 보이는 시선으로 더 무게를 둔다. 표피가 한층 중요한 것이다. 세계가 한 지붕이 되고 보니, 공용어로서는 그게 훨씬 효과적이다. 연인과 헤어졌다고, 세상 일이 녹녹지 않다고 혼자서 호숫가에 앉아 징징거릴 장면이 아니다. 피부 깊숙한 곳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감정은 표면에서 튕겨 나간다. '너만 있는 줄 아느냐' 하면서 감정을 승화시키던 시대가, 흡수되지 못하는 좌절이 분노로 표출된다. 온갖 욕설이 뒤섞인 노래는 감정의 완충제이기보다는, 내면에서 튀어나와 바깥을 향한다. 이것이 소위 통속 문화만의 잘못이겠느냐마는, 그로 인해 대중문화가 그러한지, 그 문화가 그런 시대상을 부추기는지는 서로의 원인이 야릇하다. 문화 격차라고 하면, 그것을 향유할 수 있는지 여부에 따른 것을 지칭하겠지만, 이제는 기회보다는, 취향의 차이가 더 큰 문제일 것이다.

 

3. 한 번 쯤은 상류 문화...

소위 점잖은 취향의 예술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우대받을 이유는 달리 없다. 구별짓기에 의해 , 소수 특권층의 차이와 과시를 고려하면, 이의 대척점에서 항의하는 대중문화는 보다 솔직한 것이다. 그 부류에 편입되지 못한 반작용으로 점잖고 젠체하는 기성을 무너뜨린 게 대중문화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시대적 작용을 이탈해, 부작용이나 반작용으로 점점 빠져드는 경향도 있음을 인지할 것이다. 요즘의 대중가요는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아름다운 것의 변형일 수도 있다. 신비로운 것은 은닉함으로써 상상을 자극하고 더 숭고해지기도 한다. 아마도 뉴요커들은, 그 외관의 화려함을 얼마 지나지 않아 권태로 바꿀 것이다. 처음 그 웅장함에 놀란 방문객들도, 시간이 지날수록 질식할 삶에 지쳐 갈 것이다. 익숙함이 둔감하게 만들듯이, 그것은 표피의 문제이다. 그래서 요즘 가요는 그런 점을 간파한, 알아들을 수 없는 흥얼거림인지도 모른다. 한쪽에서는 알지 못하는 오페라가 공연되듯이, 또 다른 광장에서는 랩송이 요란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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