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솔직한 시대가 곡조를 감춘다
노래가 흘러나온다. 옛날 노래다. 내가 젊은 시절에 듣던 대중가요이다. 저리도 오래된 노래가 아직도 라디오 전파를 타고 방송되다니......
그 시간을 거쳐 온 탓인 지, 문득 감성이 과거와 접속한다. 요즘 사람들은 이 노래를 들으면, 속도가 느린 데다가 감정 표현이 오히려 직설적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가사는 뚜렷이 들리는 데다가, 심장의 표피를 긁어 댄다. 요즘같이 제 감정을 솔직히 드러낸다는 세대 노래에 비해서는 역설적이다. 작금의 대중가요는 따라가지도 못할 속도와 영어 속어를 뒤섞어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래서 오히려 느낌을 잘 드러내지 않는 것처럼 들린다. 음악 자체가 운율을 언어로 하는 것이니, 그 속의 가사야 굳이 전달 요소로 하지 않아도 이미 세계 공용어로 소통하고 있는 게 아닌가?
소리로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는 율동이 지배적이니, 격렬한 움직임이 따른다. 노래를 들으면, 과거의 아른하던 추억이 머릿속에서 뮤직 비디오를 만들던 것에서, 리듬, 몸 짓 언어, 시각적 영상이 동시적으로 눈 앞에 펼쳐져 상상할 시간을 갖지 못하게 한다. 듣는 이도 그 곡조에 가담해, 노래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일은 드물다.
2. 표피에서의 감정 표현
세상이 복잡해지다 보니, 메시지 전달은 순간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거기에다가 가뜩이나 주위에 시선을 줄 여유가 없으니, 마음을 적시기보다는 보이는 시선으로 더 무게를 둔다. 표피가 한층 중요한 것이다. 세계가 한 지붕이 되고 보니, 공용어로서는 그게 훨씬 효과적이다. 연인과 헤어졌다고, 세상 일이 녹녹지 않다고 혼자서 호숫가에 앉아 징징거릴 장면이 아니다. 피부 깊숙한 곳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감정은 표면에서 튕겨 나간다. '너만 있는 줄 아느냐' 하면서 감정을 승화시키던 시대가, 흡수되지 못하는 좌절이 분노로 표출된다. 온갖 욕설이 뒤섞인 노래는 감정의 완충제이기보다는, 내면에서 튀어나와 바깥을 향한다. 이것이 소위 통속 문화만의 잘못이겠느냐마는, 그로 인해 대중문화가 그러한지, 그 문화가 그런 시대상을 부추기는지는 서로의 원인이 야릇하다. 문화 격차라고 하면, 그것을 향유할 수 있는지 여부에 따른 것을 지칭하겠지만, 이제는 기회보다는, 취향의 차이가 더 큰 문제일 것이다.
3. 한 번 쯤은 상류 문화...
소위 점잖은 취향의 예술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우대받을 이유는 달리 없다. 구별짓기에 의해 , 소수 특권층의 차이와 과시를 고려하면, 이의 대척점에서 항의하는 대중문화는 보다 솔직한 것이다. 그 부류에 편입되지 못한 반작용으로 점잖고 젠체하는 기성을 무너뜨린 게 대중문화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시대적 작용을 이탈해, 부작용이나 반작용으로 점점 빠져드는 경향도 있음을 인지할 것이다. 요즘의 대중가요는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아름다운 것의 변형일 수도 있다. 신비로운 것은 은닉함으로써 상상을 자극하고 더 숭고해지기도 한다. 아마도 뉴요커들은, 그 외관의 화려함을 얼마 지나지 않아 권태로 바꿀 것이다. 처음 그 웅장함에 놀란 방문객들도, 시간이 지날수록 질식할 삶에 지쳐 갈 것이다. 익숙함이 둔감하게 만들듯이, 그것은 표피의 문제이다. 그래서 요즘 가요는 그런 점을 간파한, 알아들을 수 없는 흥얼거림인지도 모른다. 한쪽에서는 알지 못하는 오페라가 공연되듯이, 또 다른 광장에서는 랩송이 요란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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