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념이란 것
약속을 가장 잘 지키는 방법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약속하지 않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말을 할 수밖에 없고, 그것은 건네는 순간 이미 표적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향하는지도 모른다. 말이 바깥으로 흘러나오는 순간 이미 부딪힐 것을 예고하고 있다면, 이제 최선의 신뢰는 내뱉은 이의 지키고자 하는 신념에서 나온다. 하지만 정치적이든 일반 생활이든, 우리는 그런 언약이 뒤집히는 걸 숱하게 보게 된다. 그래서 순교자 같은 사람들을 보는 것은 몹시도 숭고한 일이다. 더욱이 말의 전후에 나타나는‘행위’마저 일치시킨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작중에서 보다시피, 윤옥의 나침반 같았던 정훈은 자신의 신념을 꺾어 내다 버리고는 각종 비행과 부정부패를 저지른다. 하성호라는 사이비 목사는 외형적 이미지를 위장하고는 원생들을 착취하며 살해하기까지 하는 파렴치한이다. 수연도 한때 깨어있는 사람이었지만 현실에 굴복해 자기 아이도 윤옥에게 떠맡겨 버린다. 이런 뒤집힌 말과 행동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굳건히 진실을 지키고자 하는 몸부림은 있다. 이룰 수 없는 소망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는 영숙, 윤옥의 야학을 통한 참교육, 뇌 병변 장애아 시영의 담임이기를 고집하며 올바른 교육을 지향하는 고집 같은 것이다.
2. 질서와 바깥
세계는 나와 타자 간 언어로 구성된다. 그런데 말은 권력을 가진다. 그 힘에 의해 말은 그 권력이 작용하는 곳으로 흐른다. 그래서 말이 압살 되고 목소리가 억압되어 그 자리마저 잃을 때는 세계는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딱하게도, 차라리 뇌 병변 장애아가 '우우'하는 소리에 보다 진실이 담기고, 그들을 무시하는 정상인들의 소리가 더 부진정 해지는 것이다.
언어학자 소쉬르가 말하듯이, "발성 기관인 말도 중요하듯이,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사고 과정이 동반되었을 때 진정한 언어 활동이 있다.” 그런데 현실은 언어를 상실하고 말조차 억압받는 것이다. 우리는 기성 질서에 휘둘려 날이 갈수록 말조차 잃어가고 있다. 그 바깥은 목소리마저 할당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도 우리에겐 지켜야 할 세계가 있고 그러한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것은 시대가 바뀐다고 변하는 것도 아니다. 그 억압을 허무는 고투가 우리가‘지켜야 할 세계'에 있는 것이다.
작품 속의 정윤옥이 그렇다. 그녀는 말하는 법을 가르치는 국어교사이다. 소쉬르 같은 언어학자의 언어를 연구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녀의 갇힌 공간, 제도적 학교에서는 질서의 언어를 가르쳐야 한다. 이것은 기성의 코드와 억압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만의 프로그램으로 언어를 가르치려 하지만 기성 질서인 학생이나 학부모의 반발에 부딪힌다. 교육도 단지 수많은 판매상품의 한 가지 품목일 뿐이라는 생각일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지호같이‘우우'하는 것은 언어가 아니라 단지 소리, 잡음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한다. 기존 질서가 억압하는 교육 현장, 더욱이 포스트 모더니즘적 개인 서사로 해체된 오늘날에는 이제 그런 소리가 들어 설 곳 마저 없다. 말의 압살과 뇌병변 장애는 그렇게 평행선을 그으면서 오늘의 왜곡된 현실을 암시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3. 표면의 말과 내면의 언어 간 부조화
지호를 잘 돌보겠다고 하며 기적의 집으로 데려가는 하성호는 종교인을 가장한 사기꾼이다. 나중에는 박경수라는 허무인으로 위장하는 실체 없는 빈 껍질이다. 그가 하는 말이야말로 소리도 아닌 잡음, 괴음인 것이다. 소위 정상인이면서 장애인을 착취하는 파렴치한으로 전도되는 것이다. 침묵을 강압하는 박경수의 감금장에서는 하나같이 지호이고, 또 그리도 많은 지호가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윤옥의 학교에서는 임원 학부모 회비 같은 것을 걷는 것을 당연시한다. 그런 연유로 그녀는 늘 불이익을 당한다. 학교에서는 정상 교육 과정이란 걸 진행함에도 한 해에 150명이 자살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윤옥이 부당한 금전 수수를 거부하는 것은 정상 언어이다. 굴종 사회에 맞서 항의하는 그녀의 행위는 온당하다. 영숙처럼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만큼 비참한 건 없다”라면서 삶을 마감하는 것은 이러한 불의의 현실에 맞서는 내면의 언어이다. 그렇게 보면 뇌병변 장애를 앓는 지우가 '우우' 거리는 소리가 내면에서 나오는 지극히 정상적이며 진실한 언어이다. 그런데 세상은 그런 것들을 비정상 또는 반항이라고 구분 지으면서 정상인들의 표면의 언어로 덮어 가려 버린다. 윤옥은 이런 내면의 언어를 회복하고자 애쓰는 인물이며, 야학은 이런 언어를 회복하는 공간인 것이다.
4. 경계선에 있는‘우리'
윤옥은 수연이 내민 가입서에 서명해 전교조에 가담하면서도 직접 조직활동에 참여하지는 않는다. 윤옥의 엄마는, 지호가 잘못될 것을 예감하면서도 자기 자식을 끝내 기적의 집으로 보낸다. 수연은 저항 기질을 보이면서도 정훈과의 사이에서 난 자식을 윤옥에게 떠맡긴다. 정훈은 야학과 학생운동을 한 소위 깨어있는 존재이었음에도 미국 유학 후 대학교수, 인사 비리, 수연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 이중성을 보인다.
이 모든 예시는 이상과 현실 간 경계에서 정상과 비정상, 순응과 불순응 사이를 뚜렷이 구별하는 이분법적 구획에 비춰보면 낯설기까지 하다.
우리는 그것처럼, 이상과의 경계선을 마주하면서도 그 담장을 쉽게 부수지 못하는 것이 솔직한 현실인 것이다. 우리는 매번 경계선상의 존재가 되어 눈치를 보느라 이쪽도 저쪽도 아닌, 포함되면서 배제되고 또 배제되면서 포함되는 어설픈 움츠림을 일으키고 있다.
5. 진정한 언어 찾기
그런 비굴이라면 굴종이라 할 수 있는 것에서, 사회적 억압을 탈피하고 나와, 타자와의 진정한 언어로 소통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예를 들면, 10세기 신라 시대 득오실과 득오곡은 ‘마을’이란 뜻으로 같은 말이라고 하는 언어의 종합이다. 즉 그 유래를 따라가 보면, 말로 구분해 놓은 것일 뿐, 나와 타자를 분리하듯 다른 뜻은 아니다. 즉 장애를 안고 말을 잘 못 하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지만 할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사람 간에는 사실상 차이가 없다. 득오실과 득오곡은 그런 의미에서 나와 타자를 일치시키는 것이다.
하성호라는 파렴치한은 지호외에도 다수의 지호를 학대하고 살해한다. 그에게는 a도 b도 다 지호에 불과하다.
이는 위선적인 하성호 앞에 있는 장애인들은, 모두 걷어찰 수 있는 하찮은 돌멩이에 불과한 것이다. 타자는 눈앞에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다.
이런 부정적 사태에 대비해 보면, 윤옥은 상현을 입양하고 끝까지 돌봐 줄 것을 선언함으로써 나를 찾고자 한다.
학교에서도 동생과 같은 병을 앓는 시영의 담임이 될 것을 고집함으로써 잃어버린 동생을 회복하려는 듯 분투한다. 학교 수업에서는 자기 방식으로 수업하며 부패 고리와는 거리를 둠으로써 진정한 자기 언어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6. 지켜야 할 세계
뇌병변 장애인은 속칭 정상인과는 다른 그들만의 언어를 사용해 소통한다. 그런데 거기에는 어떤 경우든 여과되지 않은 순수하고 진실한 감정을 전달하며 소통에는 과장이 없다. 하지만 정상인, 그것도 신념을 가졌다는 사람들은 가장 큰 거짓말을 일삼고 있다. 야학과 학생운동, 부끄러움을 이야기하던 정훈은 가장 속물적인 추태를 보인다. 이런 속에서 영숙이 상징적으로 교내에서 자살하고 수연도 무너져 내렸다. 윤옥의 어머니는 하성호를 찾아내어 그에게 응징한 것이지만, 이것은 달리 보아야 할 은어이다. 다름 아닌 '아버지의 법'이라는 사회적 억압을 깨며 지켜낼 것을 향하는 상징적 제스처인 것이다.
이제 서로 다른 언어들은 모두가 지호가 되어 지호의 언어로 제주도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하성호라는 폭력적 질서와 그가 강압하던 말로 소통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이제는‘아아' 하면서 그들의 언어로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서로 타자였으면서 마침내는 모두가‘내 이름은 지호’라고 말하는 것이다. 정윤옥이 첫 장면에서 빙판에 미끄러지면서 1년 후 사망에 이르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되지만, 그것은 죽음을 각오하고 본래 언어를 회복하고자 한 그녀의 지켜야 할 세계를 암시하는 것이라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