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백개쯤이야...
하나, 둘, 서이, 너이...."
어깨 운동용 기구를 돌리면서, 어느 할아버지가 정해진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해서 숫자를 중얼거린다. 스스로 추임새를 넣는 것이겠지만, 아직은 몇 백회를 돌릴 수 있다는 자신감과, 그것을 세지 못할 만큼 기억력이 감퇴되지 않았다는 것을 과시하는 듯하다. 언제까지 회전시키는지는 모르겠다. 100이 끝나자 하나부터 반복하는 걸 보면, 몇 백개를 계속하는가 보다.
"저러다 오히려 역효과 아닐까?"
지쳤음에도 목소리가 낮아졌을 뿐, 손잡이를 놓지 않는다. 나이 들어 신체 기능이 무뎌지고, 옴직임이 둔탁해지는 것만큼 서글픈 일이 있을까? 그래서 옆에서 운동하는 다른 사람들도, 시끄럽다든 지 하는 별 반응은 없다. 겉으로 드러나는 신호는 내면으로 보다는, 바깥을 향하는 것이다.
"나는 아직 멀쩡하며, 여전히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호응할 반응은 없어 보인다.
2. 벌써 문이 닫힌다고?
"은퇴하고 집에 있으니까 무료해. 그래서 무슨 자격증이라도 따 볼까 하고 뒤적거리지만, 마땅한 게 없네. 시켜 주기만 하면 뭐든 다 할 수 있는 데..."
맞기는 맞다. 나는 다른 길을 새롭게 시작한다는 핑계로 그럴 생각은 하지도 않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면서 은근히 비아냥이 든다.
"그쯤 했으면, 그만 우려먹어라. 아직도 기득권 행세하면서 자리를 내놓지 않으려고..."
사실 이런 말을 할 형편은 아니지만, 사회는 세대에 따라 자연스러운 퇴장을 조성해야 할 것이다. 역량을 더 발휘할 수 있음에도 강제 퇴출을 권유하는 것이야 분명 문제이겠지만, 세대교체를 저항하는 것도 문제이다. 더구나 우리 사회는, 산업세대가 나름 고생했지만, 운도 많이 작용해, 사회적 부는 대부분 이 세대에게 쏠려있다. 그런데, 발전의 동력이 이제 막 올라간 시점에 벌써부터 파열음이 삐져나온다
세대 간 성향이 매우 판이한 탓도 있지만, 그다음 세대에서는 산업시대가 벌써 내리막을 걸어, 입장문을 좁힌 꼴이 되었다. 불과 아버지 세대가 저물어 갈 때, 자식 세대에서도 동반 하향을 시현하는 것이다.
3. 배부른 한숨
물론 북유럽처럼, 소득세를 납부할 때는 엄청난 고율로 고통스럽지만, 사회복지를 통해 큰 보장을 받는다는 측면에서는 사회적 퇴장이 한결 부드럽게 이어진다. 그렇지 않고 여전히 복지를 개인에 전가하다시피 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요원한 일이다. 전통적인 부양 관습도 무너지고, 오히려 부모 세대가 계속 자식들을 부양해야 할 판이니, 더욱 그렇다. 생산 주체가 아니라, 소비주체라야 적합한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정책의 실패를 면하기 어렵다.
그래서 모처럼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는 자기변명은 어째 쪼그라든다. 이 무용한 비생산적인 일을 중단하고 뭔가 먹이를 구하는 일에 나서야만 하지 않을까?
은근히 눈치가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지금 진행하고 있는 것은 사실 비전이 텔레비전이다. 멀리서만 보일 뿐 가까이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서는 것은, 그냥 하고 싶어서이다. 그러면 됐지만, 어째 어눌하다. 시간이 기다려 주는 건 결코 없지만, 조금만 더 내디뎌 보기로 하고 있다. 그때 가서야 완전히 늦어버린 것일 수도 있지만, 암튼 조금만 더 가보기로 한다. 근데 졸리다. 아직도 배가 부른 것일까?
'문화연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로운 것을 던져줄까? (0) | 2024.06.06 |
---|---|
두 줄만 읽으세요 (0) | 2024.06.02 |
대화는 일방적 전달이다 (3) | 2024.05.30 |
작작 뜯어 먹으세요 (0) | 2024.05.29 |
포함하는 배제 (3) | 2024.05.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