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은 '깊은 연못','물속 깊은 곳'이라는 뜻으로,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어서 도저히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은 막막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나무위키]
따라서 ‘감정이 있는 심연’은 마음속 깊은 곳의 알 수 없는 것으로 부터의 알 수 없는 감정을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사람 마음속은 그만큼 깊고 깊어 아무리 들여 다 보아도 제대로 알 길이 없다. 그러니 외현하는 것만으로는 심중을 모두 읽을 수는 없다.
다만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내면의 참뜻을 간접적으로 비추는 그림자이기는 하다. 그것이 하늘 한가운데 해가 떠 있어 짧게 보이든, 사선에 머물러 길게 보이든 심연에서 솟아 나오는 마음은 그 어느 쯤에 있을 것이다. 정신분석을 통하면 우리는 이 심연에 가라앉아 있는 무의식으로 교접하게 된다. 수면에 떠 있는 의식 너머에 깊이 잠재해 있는 무의식을 만나는 것은, 온갖 흘러내리고 일그러진 형상을 보는 것으로, 제정신이 아닌 비정상 취급을 받는다.
그 광기에서 실재를 대면하는 일. 그것이 심연에 가라앉아 어둠에 덮혀 있는 마음을 밝히는 일이다.
여기에서는 전아와 그녀를 둘러싼 오릿골 큰 기와집에서의 오이디푸스적 죄의식 주입과 특정한 가부장적 사회에서 빚어진 여성에 대한 차별에서 한 단계 더 디뎌, 일반적인 억압과 분리를 대입해 보고자 한다. 그 속에서 자유든 해방이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말하는 아버지의 법에서 벗어나려는 탈출선을 슬쩍 들여다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프로이트의 병실, 그러니까, 현실의 오릿골 큰 기와집을 벗어나 진정한 사랑으로 종합이 일어날 수 있을 것임을 나아가 보고자 하는 것이다.
1. 작품에서는 정신병자를 분석하는 프로이트의 침대와 현실적 정신병동을 병렬시키고 있다.
'전아'[典娥]가 입원해 있는 병동과 그녀가 살던 오릿골 큰 기와집은 이음 동의어이다. 그녀가 살던 집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억압과 분리를 현현하던 공간이었다.
여기에는 이데올로기[병실 출입구에서 나를 붙잡던, 빨갱이로 몰려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는 환상에 빠진 청년] 분리가 있다. 드레퓌스 사건처럼,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반역죄를 선고받는 구분과 배제의 선이 있다.
典娥[전형적인 여아]라는 순응적 상징과 낮닭[닭은 여자를 지칭] 우는 소리가 봄을 연상시키고, 복사꽃이 활짝 핀 풍경의 음란한 여성에 대한 금지의 비의가 있다.
‘나’의 이모는 '마님' '애기'니 하면서 자유가 없는 자유를 말하는 순종의 전형이다.
부자인 그녀 집이 이웃에 손가락질 당하는 것에‘내가’ 쾌감을 느끼는 계급 적대적 태도도 엿보인다.
세상은 본동과 별동을 잇던 회랑이 끊어진 채 별동과 본동이 붙어있는 것처럼 정상과 비정상을 가른다. '병이란 환자에의 의혹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정신이 평형상태인 환자를 볼 때마다 석연찮은 것이다'라고 하는 것처럼, 나는 정상인으로 불리나, 전아는 비정상으로 불린다.
감정의 표면만을 훑을 때는 정상이지만, 자기 감정의 경사를 바닥까지 타고 내려갈 때는 급한 기울기를 가진 비정상으로 되는 것이다.
2. 그녀의 큰 고모는 억압하는 대타자이다.
광신적 기독교인으로 원죄적 심성에 얽매여 있는 그녀는, 자신의 동생이자 전아 작은고모의 불륜을 발설함으로써 죄를 드러내고, 조카인 전아에게도 공판정에 참관케 함으로써 죄악 망상을 통해 어린 전아를 억압한다.
전아의 어머니가 병신이 된 것도, 시모와 시누이의 등쌀에 의한 강압이 작용했음이 짐작된다. 그러면서 그녀의 어머니는 눈 녹듯 사라져 버린 주변인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 팔루스[phallus]적인 억압은 곳곳에서 암시적으로 발견된다. 예를 들면, 정신병동으로 향하는 '나 ́는 정문이 아닌 북쪽 뒷문을 이용하는 데, 진흙땅에 박힌 뾰족한 돌에 걸려 넘어질 뻔한 것은, 대타자의 법으로 제어하는 상징인 것이다. 이외에도, 전아가 살던 집은 큰 고모의 억압하에 과부들이 몰려 살던 전통적 권위의 상징물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딸려 신세를 지는 ‘나’의 당숙과 이모는 착취의 대상이면서도 은혜로운 큰 고모에게 경제적으로 억압당하는 존재들이다.
3. 여기에 반기를 들었다면, 작은 고모의 비행이 있다.
아리따운 여인, 작은고모는 그 짓눌린 시대에 간통죄를 저질렀다. 그러나 투옥되었을 때는 일련의 죄의식을 느꼈을지는 몰라도, 출옥 후에는 얼굴이 밝아졌다는 것이다. 침묵하고 있지만, 조용한 해방을 이룬 장본인이다, 전아는 어릴 때부터 가장 심리적으로 억눌렸을 텐데, '나'와 현실 탈출이라는 목적을 갖고 미국 비자를 발급받는다. 그것은 냉정히 따져, ‘나’와 함께 도미하지 못해도 좋은 것이다. 그녀는 이 억압받는 현실에서의 탈출을 여기에 의존했던 것이다. 더불어‘나’도, 일종의 순수하지는 않은 목적으로 미국 비자를 힘겹게 발급받는다. 그것은 그의 신분적 굴욕감, 부자에 대한 적개심 같은 것을 상쇄시키고자 하는 목적이다. 하지만 그의 숨은 의도는 출국에 필요한 신체검사 불합격으로 이뤄지지는 않는다. 그런데 그녀도 여자 죄수를 옮기는 호송차를 보고는 억압받던 원죄 의식이 그녀의 정신을 덮쳐버리고 말았다. 그들의 사랑은 탈출선을 그리기 위한 복선이었으나, "백제 관음이 단순한 조각이 아니라 진정 '의미'가 되는 일'에는 실패한다. 빈부격차, 사회적 지위, 남녀차별 따위를 모두 거세하는 미국으로의 출국은 일단 좌절된다. 하지만 이것이 파국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통합을 향한 실마리들이 되는 것이다.
4. 이제 남은 것은 진정한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다.
"거만의 돈을 번 상인이 루블화를 가득 채워, 고국으로 떠나려던 순간 혁명이 일어나 낙엽 조각으로 변해버린 지폐를 바람에 날려 보내버리듯이, 저간의 위선을 벗어버려야 한다."
그럼으로써 "전아를 다시 품거나 영원히 잃어버림으로써 자신을 회복하는 것이다“
고모가 다녀간 다음 날 그림을 그린 전아는, "봄이라서" 그런 그림을 그렸다. 그녀의 그림은 “의식의 심연에서 일어난 비사를 보는 느낌을 준다. 공포와 쾌감과 죄스러움의 불안한 교착으로 구원의 섬광이 번뜩이고 있었던 것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여기서 억압의 삼각형을 끊고, 그녀에게 붙어있던 불안, 그 큰 고모의 기와집을 해체한다. 동시에 하늘에 구폐를 집어 던지고 싶은, 악덕 상인과 같은‘나’의 흉포한 충동은 전아에게로 가는 사랑의 회복이 될 것이다. 본연의 순수한 모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