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으로 밤잠을 설친다. 열대야가 2중으로 가세한다. 둘 중 하나라도 있으면 밤을 뒤척이게 하는 일에 충분할 것 같은데 말이다. 이 초과에 대해서는 냉방기를 가동한 tv 시청이 가당할 것이다. 아직은 방학을 하지 않은 탓인지, 아니면 tv대신 다른 매체를
이용하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시청자가 별로 없는지 요즘은 금메달을 획득해도 함성이 없다. 불과 몇 년 전 정도만 해도 축구 예선전조차도 골이 터지면 동네가 야단이었는 데... 그때만 해도 심야에 동네가 소란스러운 것도 다 양해 사항이었다. 지금은 관용(?)을 베풀려고 해도 별로 그럴 일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세월이 지나면 요즘 세대는 무엇으로 추억을 말하려나 궁금하다. 뭐 나름대로 세월이 지난 이야기를 해대겠지만, 자연과 어울린다든지, 모두가 공감하는 일 하나쯤 겪고 지내는지 하는 것이다. 결핍이 따를 때에는 하나 하나가 주목을 받게 된다.
그런데 초과나 과잉은 좀처럼 기억에 남는 게 없다. 열대야와 올림픽이 겹치는 것은 냉방기 가동과 심야시청을 겹치게 한다. 좀 더 지혜롭게 살려면 다음날 하이라이트를 보면 된다. 하지만, 동시에 일어나는공감 따위는 생기지 않는다. 결과를 알고 난 후에
이를 재확인하는 기시감도 있겠지만, 감동 따위는 현저히 줄어든다. 더욱이, 그것은 내가 느끼는 것보다는 남의 해설, 과잉된 평가에 직면하게 된다.
초과는 결핍의 공백에 진입하는 감동을 메꾼 채 눈앞에 던져진다. 거스럴 수 없는 AI 시대에 우리가 저항하고 반발한다면 그런 일면일 것이다. 인공지능은 지식에 관련된 빈칸은 모두 메꿔 버리니, 무언가를 탐색하거나 부족한 것을 추적하는 일을 멈추게 한다. 이 과잉은 자연히 감정을 메마르게 할 것이다.
어떡해서든 모르는 것을 알아내려고 낑낑거리다가 깨닫는 희열어 순간은 사라진다. 단순 반복적인 지식을 어리석게 찾아내느라 헐떡거리는 헛고생을 면하게 해 줘서 유용하기는 하다마는, 노동에서의 해방이란 게 그런 의미는 아닐 것이다. 착취 구조를 해체하고 개별자를 도구에서 해방시키고자 하는 이 과잉됨은 그 공백을 충족할수록 인간의 공간마저 침식한다. 어울리는 비유는 아니지만, 심야에 극장골을 넣은 대표팀에게 환호를 보내는 일은 점점 엷어지는 것이다. 온갖 기계장치에 의해 분석된 정밀한 데이터로 무장한 선수들 마저, 누가 경기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인간 능력의 경기가 아니라 가히 데이터 경기라 해도 무방할 지경이다.
이런 과잉이 무엇을 초래할 지는 자명하다. 인간은 자기 고유 영역을 유지하기 위해 더욱 결핍해질 것이다. 세상이 보다 발전했는 데 빈곤이라는 것은 말이 아니다. 하지만, 물질적인 것은 몰라도, 정신이 추구할 공간은 계속 쪼그라들 수밖에 없다. 이제 정상과 비정상의 구획은 기기조작 능력 여부에 의하는 것이다. 정신의 결핍은 무한히 커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