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상현 교수의 존재와 사건이라는 강의를 한 번 시청했는 데 이런 언급이 나온다.
"고대 알타미라 동굴같은 곳에서는 원시인이 동굴 벽화를 그렸다. 종교적 이유, 일종의 놀이 같은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인간의 불안, 공포를 회피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라고. 사람은 아무것도 없는 벽면을 보면 상상력을 발휘해서 온갖 공포를 만들어 내는 경향이 있으니, 벽화를 통해 상상의 제한을 가하는 것이라고.
그럼직한 내용이라는 생객이 든다. 혼자 사는 사람들 집을 가보면, 집이 좁은 면도 있지만, 온통 빼곡한 곳 없이 사납게 몰건을 갖다 붙인다. 더 이상의 빈 곳이 없게 만들려는 듯이, 한정된 공간을 가득 채운다. 어둠이 주는 막연한 불안도 있지만, 밤 길을 혼자 걸어가는 건 몹시 두려운 일이다. 그 빈 곳을 온갖 불안한 상상이 가득 채운다. 정말 우주가 별 하나 없는 암흑이라면 참으로 공포스러울 것이다. 그 속에 절대자 같은 걸 채워 넣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 것이다. 그래서 무엇이든 '있다'로 바꾼다. '칠흑 같은 공간이 '있다' 빈 곳이 '존재한다' 등
이 있지도 않은 것마저 '존재로 바꾸지 않으면 참기 힘든 모양이다. '없다'는 '있다'의 반대말이 아니다.
'없는 것이 '존재한다' 물론 존재는 '있는 것'에 관한 풀이이지만,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
언어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이미 불가능을 말하는 모순이다. 암튼 빈 것은 사실 도달 불능으로 남겨진 것이다. 상징의 세계에 질서잡힌 것을 비워내라는 것은 실재를 대면하라는 뜻일 것이다. 실재는 사실 뭔지 알 수 없지만, 근원은 두려운 무엇일 것이다.
가난에 찌든 삶이 무섭다기보다는, 근본 불안에 닿기 때문에 이를 회피나는 것일 게다. 그런데 사람들은 무언가를 잔뜩 채우고도 알 수 없는 불안에 방황한다. 채우는 것은 분명 한계가 있으니, 그것으로 불안을 피할 수는 없다. 임시적 사태에 불과할 것이다.
반대로 덜어내는 것은 직접 맞닥뜨리기에 가깝다.
어느 방향도 싸워 이겨내기에는 버겁다. 그럼 어떡하라는 말인가?
어느 방향이라도 근본 불안은 떨쳐낼 수는 없다.
만약 불안을 깨쳐낼 수 있다면, '불안이 다 없어지면
이젠 무얼 해야지?'하는 불안마저 있을 지경이다.
심지어 인식이 구조화되지 않은(상징계 질서를 벗어난, (소위 비정상인) 존재들 마저 불안을 느낀다.
동물이나 식물마저도 불안에 반응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신경계를 가지지 않은 광물 정도나 그것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불안이 없다는 것은 자기 방어에는 취약하다. 살아 있는 것들은 공백을 둠으로써 그것을 채워 나간다. 자기 충만한 자연조차도 사실은 공백을 채워간다.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은 그 속을 있는 것으로 채워간다. 하지만 채워 나가는 것이 많을수록 불안도 크다. 가진 것이 많아 불안한 것이 아니라, 불안해서 더 많이 가진다. 그 채워야 할 허전한
공간이 많은 존재는 그만큼의 볼안이 큰 존재이다.
그래서 퇴행처럼 보이지만, 불안이 어떤 존재자에게든 근본적인 것이라면, 차라리 대면하는 게 더 낫다. 회피하면서 채워야 할 공간이 점점 늘어나는 것은 감당할 수없다. 직접적 대면은 고통이 따르지만, 적어도 고통으로 바꿔주지는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