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user-scalable=no, initial-scale=1.0, maximum-scale=1.0, minimum-scale=1.0, width=device-width"> 행복[⨫, -] = [*,+] : 나누고 빼는 것이 곱하고 더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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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예

행복[⨫, -] = [*,+] : 나누고 빼는 것이 곱하고 더하는 것

by canmakeit62 2024. 6. 29.

 

 

1. 행복이란 무엇일까?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철학자. 종교인들이 고뇌한 물음이지만, 한마디로 정의를 내리지는 못한 것이다. 세상을 사는 것이 상대적인 양 축으로 맞서니, 절대적 기준을 마련하기는 힘든 노릇이다. 그러니 유일한 절대 판단이라면, 아마도 판단 기준을 둘 수 없다는 것만이 그러할 것이다. 재력, 사회적 지위 등 물질적인 것은 일시적인 것이다. 가진 사람, 권력을 보유한 계층도 더 많이 소유한 타인, 더욱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에게서는 불행으로 바뀌어 버려 불안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방향을 돌리면, 난치병으로 장기간 고통을 겪는 사람, 오염된 물이라도 마실 수밖에 없는 제3 세계인을 보면, 자신이 그러한 처지가 아님에 다행이라고 여겨 오히려 행복하게 여기게 된다. 결국, 행복은 절대적이라기보다는, 상대적인 성격이 강하다. 법정 스님같이 무소유를 추구하시던 분이야 예외이지만, 속세의 일체를 던지듯, 이같은 상대 비교에서 벗어난 삶을 사셨으니 그렇게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스님조차도 가끔은, 절대 기준을 던지고 안락한 생활과 우러름을 느끼며 살고 싶지는 않았을까?

 

 

2. 어쩌면 행복은 연속되는 감정이라든지, 지속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행복이란 게, 워낙 포괄적이고 유동적인 성격을 띠다 보니 마음도 거기에 따라 달라진다. 결국 남는 것은  행복이 어떤 정지되고 안정된 준거가 아니라, 찰나의 순간에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이는 일시적 쾌락을 얻고 다음 단계로 이행하며, 끊임없이 갱신된다는 것을 말하기보다는, 절대적 고정 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태양이 작열하는 한여름에는, 나무 아래 조그만 그늘 한 조각도 아주 큰 행복이다. 그러나 그것은 냉방기가 가동되는 카페에서, 시원한 음료 한 잔에 금세 자리를 내어 준다, 명성이라는 것도, 일순간 주목으로 행복해하지만, 그것은 금방 끊겨 버리는 것이다. 타인과의 관계를 전제한다면, 행복은 지속해서 접속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다시 돌이켜 보면, 그것의 절대 수준을 만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타인과의 상대 비교를 중지하는 것에서조차도 지켜내기 힘든 행복은, 이 찰나의 진입 순간을 둠으로써 가능해 보인다는 것이다.

 

3. 그것이 상대 비교를 중단한다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단 말인가?

법정 스님은 불일암 후박나무 아래, 그 소박한 곳에 자연의 일부로 남으셨다. 그조차 필요하지 않을 것 같지만, 최소한의 소유에 그쳤다. 그런데 그 모습은 어디와도 비교할 수가 없다. 겨우 오래된 나무 아래 묻히고, 생전에 쓰시던 용품 몇 가지만을 남기셨으니, 세속사와는 비교할 대상이 없다. 그런데 극락에서도 이렇게 말씀하고 계실 것 같다.

저런, 저것마저도 괜한 사치가 아닌가?”

이 재량 할 수 없는 숭고함은 높고 가진 존재가 아님에도 사람들을 저절로 겸허하게, 미소짓게 만든다.

 

내가 죽을 힘으로 뛰는 게, 도대체 어딜 향한다고 이러지?”

돈이 많아봤자, 죽어서는 이 한 줌 흙보다도 못한 꼴이 될 텐데.”

무수하게 많은 상대적 잣대와 자신을 옥죄는 상징들은 찰나에 소멸한다. 이 순간을 평생 실천하신 스님은, 자신이 주장할 필요도 없는 행복의 찰나를 늘 만나고 있었을 것이다.

 

4. 그것을 세속이 깨닫기에는, 너무 많은 비교의 올가미에 붙잡혀 있는 것이다.

스님은 아마,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래도 남기고 싶은 게 있었다면, 바로 이 스님과의 접속을 통한 깨달음의 연결만큼은 말하고 싶었으리라!

행복은 물질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것에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물질적인 것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상대적인 것이므로, 절대 행복은 바로 이 순간에 있다고 생각한다. 지나가는 한순간으로서가 아니라, 모든 것이 절대로 귀의하는 그 찰나로서 말이다.

이것은 시간이 연속되든, 끊어졌지만 이어진 것처럼 보이든, 그것이 드러내는 현상의 연장(延長)을 나누고 덜어내서 극한 순간을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무소유를 이루는 순간, 그것은 찰나에서 행복을 만나는 것일 것이다. 이 무를 향한 것은 결핍하기는커녕, 다 나누고 덜어내는 것에서 오히려 흘러넘치게 된다. 그래서 자신을 채우는 게 아니라, 비워내는 것에서 행복을 말할 수 있다는 가르침을 남기신 것이리라!

행복은, 무소유에서 비로소 흘러넘친다는 깨달음을 주고 계신 것이다.

그런 자각이 저절로 행복한 미소를 짓게 하지 않는 가?

이미 가까이 있던 것을, 이제야 비로소 행복을 알게 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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