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른 것이 어울린다.
세상의 사물은 본질이 있다면 현상은 그것의 발현 내지 재현이다. 돌에 붙은 이끼는, 그 자체의 생성을 드러내는 것이겠지만, 단단한 돌에 달라붙어 그 성상을 나타낸다. 그보다 무른 나무, 아니 그 감각과 훨씬 잘 어울리는 듯한 땅바닥은 그나마 그러려니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필 딱딱한 바위라니?
아마도 습기는 이끼 자신이 머금으면 되고, 물이 쉽게 빠지는 곳을 선호한 탓이리라. 그렇게 암석은 감각상의 굳은 질감에서 벗어나, 부드럽고 생기있는 초록을 얹고 있다. 우리가 얼른 주목하는 것은, 바로 그 위에 덮여 사는 양치식물이다. 이 말랑말랑한 감촉이 그 대척점에 있는 강도의 사물과 한 몸처럼 얽히다니!
본질을 파고 들어가면 이 돌덩이도 낙엽이 썩어 흙이 되고, 세월을 지나 그 위에 쌓인 것들의 강한 압력이 작용하고...
그래서 이끼는 바위를 좇아 그 위에 얹히는 게 별로 부조화스럽지는 않아 보인다. 우리가 흘깃 보는 이끼가 연성 생물이라, 경성의 무생물에 합일하는 것이 얼른 이상하게 보일 따름이다.
2. 모든 게 산 것이다.
식물을 키울 때 화분같으면 표토에, 풍란 같은 구근 식물엔 뿌리 주위에 이끼를 감싸기도 한다. 습기를 좋아하는 식물들은, 이끼가 품는 그것을 활용하기 위함이다. 물론 이것은 과습을 유발해 그 식물들을 연부병에 걸리게 하는 원인자가 되기도 한다. 암튼, 그것은 포근한 양탄자 이불처럼 식물을 잘 감싼다. 그런데 그 속에는, 그 식물만큼이나 아늑함을 느끼는 민달팽이가 서식하기도 한다. 이것은 의도하지 않게 식물의 잎을 갉아먹거나 , 병충해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난초 입장에서는 이끼가 도움이 되면서도 해를 끼치는 역할을 한다. 바로 이런 모습을 보면, 돌덩이가 이끼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이끼가 돌을 키운다. 무기물조차 생명현상이 있다면, 시적 허용으로만 볼 수는 없는 표현 방법이, 제 몸을 덮고 있는 유기물과 함께 발현한다. 그것을 생명이 꿈틀거린다고 하는 건 억지이지만, 본질로 추급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은 살아있는 것이 든 그렇지 않든, 사람의 기준을 제거하면 모두가 살아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애니미즘 같은 전근대적 사고라는 것에 의존하지 않아도 근본을 따지고 보면 그렇다.
3. 근원은 같다
우리는 바위에 얹혀 사는 이끼처럼 자연을 빌려 생존한다. 그러나 그것이 바위를 키우는 이끼가 아니라, 돌과 양치식물을 확연히 구분하면서 돌은 돌 일뿐이고, 이끼는 이끼가 되었을 따름이다. 심지어, 돌과 이끼는 사람에 소용되지 않는 한 그것들은 내쳐지고, 무익하거나 걸리적거리는 걸림돌로 취급당한다. 정원 한구석에 배치되어 어떤 자리를 지정받을 때에야 비로소 그것들은 무엇이 된다. 나머지는 모두 사물로 다루어져, 밤사이 이슬을 머금고 아침 햇살에 생기를 전하는, 소박하지만 숭고한 역할은 잊히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이런 작은 것들이 모여 큰 것의 바탕이 된다. 잔뜩 웅크린 것에서는 세상의 근원을 품고 있음을 잘 보지는 못한다. 자세히 봐야 잘 보인다는 말처럼, 눈에 띄지 않는 이런 것들에서도 우주를 품고 있는 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