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용서의 역학
용서한다는 것은 지난 과거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비난받을 내용을 모두 삭제해 버리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지난 일을 다시금 문제 삼지 않는다는 태도이지만, 흔적을 모두 지우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일을 행함에는, 상대보다는 실질적 우위에 있는 것이다, 약자가 강자를, 피해자가 가해자를 끌어안는 것은 그 관계 자체에서 보면 파생되지 못하는 역학관계이다. 용서를 통해서 서로가 물리적으로 동등해지는 건 아니다, 권력자는 여전히 권력자이고, 가해자는 계속 그러할 뿐이다. 그들이 처음으로 수평선 상에 놓인다면, 그것은 심리적 지평선뿐이다. 한 번도 같은 선 위에 놓여 보질 못했던 존재간에는, 공감이라는 지평이 열린다. 그렇지만, 그러기에는 정말 마음속에서 강한 갈등이 생긴다. 용서받을 자격, 용서할 용기가 끊임없이 충돌해, 마음을 어지럽힌다. 내게도 그런 사람이 있다. 지금도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순전히 나만의 편견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직도 선뜻 나서서 이전을 폐기하고 관계를 되돌릴 만한 용기는 나서지 않고 있다. 이젠, 시간이 제법 흘러버려, 오히려 그런 액션을 취할 적기마저 놓친 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2. 또 다른 짐을 만드는 건 아닐까?
사실 나에게는 제법 긴 시간 동안의 고통이었던지라, 그가 나에게 저지른 과오는 지금도 문득문득 떠올라 나를 괴롭힌다. 심지어는 꿈에서도, 가끔씩 그 일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럴 때마다, '이젠 모든 걸 잊고 다 떠나보내 볼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어쩐지 실행으로 옮겨지지는 않는다. 사실 지금 다시 만나 관계 회복을 시도하더라도, 예전같이 지낼 처지는 못된다. 이해관계에 의해 시간을 함께 해 왔던 건 아니지만, 지금은 서로가 그게 쉽지 않은 나이가 되고 말았다. 옹졸하게 보이겠지만, 만약 이전을 회복하더라도 이제는 그가 내미는 손을 선뜻 잡아 줄 형편은 되질 못할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관계 복구는 오히려 더 큰 짐이 되어 버릴 것이다. 별 도리없이. 나는 마음속으로만 '그때 왜 그런 짓을 저질렀냐?'라고 하는 독백을 중얼거리게 된다. 현실로서는 용서라는 게 이렇게 과거를 없애고 현재 이후만을 말하는 것이 될 수는 있어도, 그 자취마저 없애는 것은 아니다.
3. 심리적 균형이 필요하다
고통이라면 자신이 겪는 고통을, 용서를 통해 면제해 주려는 내용이겠지만, 가해자의 고통도 동시에 상계하는 것일 게다. 그러나 무게를 재면, 피해자가 지불하는 것이 훨씬 더 크다.
'누구 좋으라고 용서해!'
짐을 더는 입장은 과오를 저지른 측이 한결 크기는 하다. 세속사는 이의 보전책으로 손해배상이나 손실보상을 부가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는 게 아닌가?
혈육지간이나 성인 군자가 아닌 다음에야. 이렇게라도 무게 균형을 맞추는 게 그나마 공평해 보인다. 그렇다고 '내가 가진 고통이 어느 정도이니, 사면령을 내리는 동시에 얼마간의 금전적 벌충을 해라'는 식의 일상사가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용서에는 지난한 심리적 마찰과 큰 용기가 필요할 지 모른다. 그 행위를 지원하고 보충하는 부가적 결단이 중량을 보탤 것이니 말이다. 거북한 표현이지만, 심리적 공리주의가 필요한 건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그만 재량질하고 현실로 나서야 함에도, 아직 균형추가 맞춰지지 않은 걸까?
망설임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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