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벽에다 대고 말하는 건가요?
사람들은 내게 말한다. 쓰는 글이 너무 추상적이어서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모르겠다는 것이다 개인사를 혼자 간직하는 일기처럼 적나라하게 기술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읽는 사람이 어떤 의도와 결론이 따른다는 걸 알 수는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것을 듣는 대로 해석한다면, '그럴 것 같으면 차라리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게 좋겠다'는 것이다.
'그것도 못 새겨 읽는 것은 네 수준 문제이다. 흔한 이야기를 엮어 봤자 말 그대로 개인적 기록으로 보관하고 말지, 누가 보든 말든 나는 내 생각을 기술할 뿐이다!'
사실 생각해 보면, 그들의 지적이 맞다. 글을 통해서 타인과 소통하며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것인 데, 어쩌면 남의 비판을 피하기 위해 나 자신만 알 수 있는 코드를 기입하는 것 같으니 말이다. 고대의 신비를 간직한 기호는, 누가 알아보는 것과는 상관없이 그 시대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알 수 없는 상징으로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2. 중독 증상이 심하군요
그렇다고 '도는 말하는 순간에 이미 도가 아니다'라는 말처럼, 그 절망적인 접근 불가능성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님에도 말이다. 거기에다가, '뭐, 누가 읽어주거나 알아보지 못해도 개의치 않아. 난 나의 상념에만 충실하면 그만이니까'하는 류의 고립으로 맞서는 것이다. 참으로 모순적이다. 스스로 항변하면서도 읽히지 않는 글, 남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글을 무엇 때문에 지껄이고 있는 걸까?
글쓰기나 읽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겐 격분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지만, 그런 것도 일종의 중독은 중독인 모양이다. 아무것이라도 끄적거리다 보면, 마음속 잡념들이 가라앉는다. 적어도 글을 쓰는 동안엔, 그것이 아무리 유치한 잡념에 불과하더라도, 침전물이 가득 섞인 흐름이더라도, 머릿속은 정화되는 느낌이다. 정제되지 않은 사념이 밖으로 흘러나오니 부유물이 둥둥 떠다닌다. 그것을 시간을 두고 걸러내고는, 마시기 알맞은 식수로 내놓아야 하는 데 그렇지 못하다.
3. 일회적 소비에서의 탈출
사람들의 생각이나 경험엔 분명한 한계가 있다. 그러니 의도적으로든 의식하지 못하든, 타인의 글을 참고하거나 심지어는 남에게서 빌려 온 생각을 자신의 독자성으로 슬그머니 삽입해 버린다. 더 나아가면, 예전에 비슷한 글을 쓴적이 있음에도, 마치 처음 생각한 것처럼 스스로를 표절하기도 한다. 타인에게서 읽히지 않은 글이 오히려 자기에게서만 그러하니, 스스로를 세뇌시킨 것이나 다름없다. 저기 자신의 다른 글도 참고는 할 수 있겠지만,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결과, 또 읽히지 않는 글을 재생산해 내는 것이다. 그렇다고 읽히는 글을 지향하다 보면, 정말 '자본주의 글쓰기'가 되기 쉽다. 대중 깊숙이 파고들어 취향 문제를 훑어 주면 될 것이 아닌가!
이러니 전자 펜이나 키 보드, 인공지능의 도움을 빌린 글쓰기를 따라 갈 수 없는, 구석기시대 돌로 새기는 암호 코드만 자꾸 생기게 된다. 하지만, 읽히지 않는 글이 오래갈 수도 있다. 소비로서의 글쓰기로 하면, 이 세상엔 무수한 소비재가 공장식 방식을 거쳐 생산되고 있다. 따지고 보면, 글쓰기도 일종의 사양 산업이다. 그런 시대 조류에 항거해 본들 별 소용은 없다. 하지만, 읽히는 글의 일회적 소비를 벗어나 읽히지는 않지만 남아 있는 글쓰기는 어떤가?
(그런데 읽히지도 않으면서 생존 여부는 어떻게 결정하지? 현상학의 괄호치기가 이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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