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두운 곳에서 갑자기 밝은 곳으로 나오면 앞이 잘보이지 않는다.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면 사방을 헤맨다. 둘 다 명순응, 암순응의 손응이 필요하다. 극장같은 곳에서 더듬거리며 자기 자리를 찾는 사람을 보면 우습기도 하다. 연극이나 영화는 이미 관객에게서 1부가 공연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미 깜깜한 미로를 찾는 역할이 먼저 주어진 셈이다. 겨우 자리를차지하고 곧 어둠에 익속해지는 관객은 이번에는 무대에 올려진 장면에 키득거린다. 자신도 이미 배역 한 부분을 연기하고서도, 진짜 연기는 그곳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만약 연출자가 이런 부분을 도입부로 설정했다면, 관객은 첫 장면의 연기자가 되는 셈이다. 그렇지만 연기는 무대 위나 스크린으로 구획짓는다. 삶에서는 누구나 연기자가 된다. 조명이 밝은 곳에서 하이라이트를 받는 주연급이 있고, 무대 밖에서 한 줌 불빛도 받지 못하는 엑스트라도 있다. 그러나 연극이나 영화처럼 완전히 배역을 할당받지 못하는 연기자는 없다. 그건 고역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것이다. 그 역할을 거절할 수도 없다.완전히 무대가 치워지지 않는다면 그 연기는 계속된다.
시나리오도 없고 '오케이 컷!' 사인도 없다. 낮거나 좁은 역할로 보수도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2. 그럼에도 연기는 계속된다. 사람들은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아니, 역할 연기를 계속할 수 밖에 없으면 스스로가 인생의 연출자가 되기라도 하라고 그런다. 스스로가 캐스팅한다면 인생은 다른 무대가 된다고.. 그렇지만 돗자리를 깔기는 쉽지가 않다. 그 위에서 어떻게 연기해야 하는 지도 미지수이다. 이 무대를 구성하기 위해 사람들은 바삐 움직인다. 그 자체가 이미 연기인 채로...
연극 무대를 모두 걷어 버리면 어떨까?
그것이 없다고 연기를 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무대 밖에서도 연기는 얼마든지 진행된다. 각종 조명이나 음향 장치, 무대를 꾸미는 배경이 빈약할 뿐이다.
주어진 배역은 없다. 그때마다 시시각각으로 떨어지는 배역에 열중할 뿐이다. 하지만 고달프다. 한번 쯤주연이 되고 싶지만 언제나 무대 끝에서 발을 헛디딘다. 새가 되어 날아가는 꿈은 좀처럼 대본에 포함되지 않는다.
3. 새는 높은 하늘을 나는 자유를 상징한다. 알을 깨고 높이 나는 창조적 존재로 그려진다. 그런데 그 새가 높이 날기 위해서는 몸을 가볍게 해야 한다. 더러 철새는 도래지에 닿기 위해 몇 날 며칠을 쉬지 않고
날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에게 무거운 역할을 부과한다. '비상하라, 힘차게 날아라, 폭풍을 뚫고 전진하라!'
'굶고 속을 다 비워라, 날개가 부러지도록 퍼득거려라, 자연에 맞서 죽기를 각오해라!'
이 험한 역할을 우리는 타자 존재에게 부여한다.
'나도 그러하니 너에게도 그것을 희망한다' 라는 정도이면 그래도 낫다. '내가 그 역할을 하기엔 너와 다른 무대가 마련되어 있다'
거부할 수 없는 무대, 그 위에서 역할은 임의의 선택을 잘 따르지는 않는다. 풍자극이라면 또 모를까?
그래서 인생은 한바탕 연극이라고 하는 것일까?
그것도 극장에서 컴컴한 계단을 더듬거리는 관람객을 보고 킬킬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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