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수필을 쓴다는 것
수필을 쓰는 게 그중 가장 쉬운 것인 줄 생각했다. 시는 수많은 말들을 짧게 압축하는 것이니, 이를 조각하기가 쉽지 않다. 조금 늘이면 감정이 노출되기 쉽고, 고도로 생략하면 추상적인 미사여구 나열에 불과하기 십상이다. 소설은 늘어뜨리는 것으로 어느 정도 절제할 것도 긴장을 풀어헤칠 수는 있겠지만, 장문을 어어야 하니, 그조차 만만찮다. 그 가운데쯤이 수필이라 여기지만, 이번에는 서사가 없다. 요즘에 간혹 느끼는 것이, 수기가 어느 쪽으로 포함되어도 상관없겠지만, 특히 수필과의 한계가 모호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 얼굴을 드러낸 수필을 보면, 개인적 난관을 극복한 것이 감성을 자극하고, 그것에 눈이 많이 간다는 것이다. 사람이라 불가피하게 타인의 고통에 연민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아주 평범한 삶을 살아왔고, 지금도 그러니 큰 서사가 없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 했다'라는 말이 이럴 때 딱 들어맞는 말인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다.
소싯적 1대 13으로 대적한 영웅담이 누구에게나 있었을 리는 만무하다. 그러지 않은 게 정상으로 들리니까.
2. 조그만 것부터
온갖 고생 끝에 성공한 연예계를 보더라도, '그럼 차라리 저렇게 사는 게 바람직하단 말인가?'라는 결론을 낼 수는 없다. 크든 작든 세상사는 모두 서사인 데, 그것이 전혀 없다는 것도 말은 아니다. 이를 훌륭하게 미학으로 연결하는 사람들도 많이 봤다. 그렇지만 역시 서사가 있는 것이 풀어 내기에는 수월하다. 하지만 작은 이야기도 대단한 감동을 전달하는 데 큰 몫을 할 수 있음을 발견한다. 이리저리 둘러 다 보면, 잊히고 지워진 것들이 서사로 연결되기도 한다. 그래서 수필을 포함해서, 모든 글쓰기는 일상이 서사가 될 수 있는 것이라 여긴다. 문제는 이를 과장하거나, 덧칠을 시도하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압도적 스펙터클을 넘어설 만큼 그것을 작성하기에는, 얼마나 큰 스케일의 문장이 동원되어야 할 것인가? 그래서 거시적 접근보다는, 미시적 방법을 택해 보았다. 그랬더니, 보이지 않던 것도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는 것이다.
서사는 장엄한 규모를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어디로 향할 지 모르지만, 발을 옮기기 시작하면 발자국이 남는다.
3. 서사 만들기
대신에, 다른 사람이 거쳐간 흔적은 가급적 피하려 한다. 어디 빈 틈이 남아 있겠느냐마는, 그럐도 공간이 열릴 것이다. 말이 다가오지 않으면 말을 걸면 된다. 더러는 어느 소란스러운 카페도 좋다. 무심결에 옆에서 흐르는 말에서 공동 작업이 진행되는 것이다. 그냥 걷다가도 서사는 펼쳐진다. '저 사람 왜 저럴까?' 하는 것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심지어는 아무 생각없이 단어 하나를 던져 놓아도 생각이 따라붙는 일도 생긴다. 그래서 아무 목적 없이 밖으로 나온다. 생각들이 따라 나서고, 말이 접근을 해 온다. 아무 유치한 생각이라도 좋은 것이다. 그중에서는 몸을 숨기고 있다가 불쑥 곁에 나타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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