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user-scalable=no, initial-scale=1.0, maximum-scale=1.0, minimum-scale=1.0, width=device-width"> 죽고 사는 것이 무엇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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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예

죽고 사는 것이 무엇이라고요?

by canmakeit62 2024. 4. 11.

1. 두 번의 주연

사람은 태어나고 죽는 순간에 단 두 번, 세상의 주연이 된다. 물론 그중에는, 전체 생을 통해 단 한 번도 주목받지 못하는 삶도 있기는 하다. 그런데 허무주의적 시각을 들이 밀면, 삶을 꾸려가는 중간에 받는 주변의 관심은 단절을 막고자 하는 몸짓에 불과하며 부러지기 쉬운 연약한 것으로 금방 사라지는 것이다. 타인의 시선을 받는 것으로부터 탄생이 주던 이목과 기대를 연속하고자 하는 제스처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면, '어떤 것이 본래적 삶인가?' 하는 것은 여전히 의문스러운 것이지만, 암튼 이 연장선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쉼 없이 상징계에 이미지를 덧붙이는 지난한 움직임을 계속한다. 누구든 죽음이라는 무를 향해 의식적으로 달려가는 사람은 없을 것이지만, 그것은 '허무' 그 자체가 된다. 하지만, 생을 유지하는 동안에는 '죽어도 좋아!'와 같은 초월론적 태도가 더 우세하며, 죽음은 끝이며 모든 것을 텅 빈 것으로 돌려놓는 것의 부정성이다. 그렇지만, 인생의 목적을 상실하거나, 기초적 신진대사 공급도 받지 못하는 존재에게는 사는 것이 죽음보다 결코 낫지는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그것을 메꿔가는 것이 허상 같은 이미지일 것이다. 그 본래의 장면을 가린 채, 많은 대체물로 자신을 베일로 가려야 하는 것이다.

2.  죽을 마음은 아닙니다

삶은  '죽어도 좋아!'와 같은 극한의 의지. 결단을 생성해 내지만, '이렇게 살다가 죽는다는 건 무엇이지?'라든지, 죽음을 애도받는 최후의 주연으로서 '기껏 한 줌 흙으로 돌아가기 위한 덧없는 몸부림을 했단 말인가?'와 같은 충격을 직면한다. 과거도, 미래도 모두 관념적인 것에 불과하고 존재하는 것은 오직 현재뿐이니 '오늘을 즐겨라!' 라는 말이 불쑥 고개를 내밀지만, '과거는 지나간 현재이며 미래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현재이니, 내 곁에 있는 건 '지금' 뿐이다'라는 향유를 추동하지만, 자신을 기준으로 보면 태어나기 전에도, 생을 마감한 이후에도 남는 건 아무것도 없다. 있다면, 관념적이거나 종교적 믿음 같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세계를 상상하면서 현실에서 그 무를 삭제하려고 한다. 없는 세상은 없는 것으로 관념하려 하니, 무언가 그를 대신할 것들이 필요하다. 새삼스럽지만, 그 자체가 무엇이라는 가치를 부정하면서도 온통 주변을 물신의 세계로 만든다. 허무와 소멸을,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만지고 볼 수 있는 현실 공간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물질적 삶이 아무 쓸모없다는 지탄은, 이러한 뿌리를 갖는 것임에도 말이다.

3.  경험할 수 있다는 착각

누구인가는 죽어서도 자신의 이름을 남길 정도로 영원히 소멸되지 않는 존재로 남는다. 마치 시공을 초월하듯이 과거에서 소환되어 현재에 대해 이야기하고, 미래를 향한 행로를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한 존재는 사라지지 않고 늘 도래하는 현재이다. 물질적 존재로서는 이미지를 상실하지만, 심상으로는 항상 곁에 있는 것이다. 그는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또는 죽음이라는 상실을 통해 비로소 자신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그것은 본래적 삶으로 돌아가라는  '죽은 자의 끊임없는 귀환'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든, 의미없는 삶으로 여기든, 세상의 삶이 결코 완전하지 못한 덕택에 이 가르침은 무한한 반복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그래서, 산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든 사실은 그 스스로는 의미가 없다. 그것은 허무를 말함이 아니라, 영원히 태어나고 사라지면서도 되돌아오는 깨달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을 긍정하고 생명 현상을 지속하고자 하는 것도, '유'를 얻어 무엇을 확보하기보다는,  '무'로써 공백을 채우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탄생과 죽음이라는, 살아 있는 동안에는 누구도 경험할 수 없는 초월성은, 사실은 그 누구도 주연이 될 수 없는 현상이다. 다만, 인간은 눈으로 보는 것, 손으로 만지는 것에서 그 이미지를 목격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