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어디로 가려는 듯 깊은 주름 일렁이던 물결. 제 닿을 곳 맞다는 듯, 고요한 동심을 그린다.
모두의 무게가 심연으로 빠지는 시간, 다시금 물빛은 꿈틀거리고 거꾸로 선 산이 흩어진다. 파문에 놀란 새, 깃털에 젖은 새벽잠 털어내고는, 놀란 둥지 위로 날아오른다. 하늘은 호수를 내려 보지만, 호수는 저보다 더 큰 하늘을 품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멍한 한가로움. 풍덩 물자맥질이 일어난다.
세월이 가라앉은 곳. 지난밤 그 아래에선 얼마만큼의 추억이 닿을까?
저기쯤 섶다리, 거기엔 정미소, 노모의 눈가는 어느새 호수가 된다. 잘 살아가기를 바라며 붉은 손 놓았던 천안댁. 이젠 딴 세상 사람으로만 눈길을 맞춘다.
수몰 지역엔 사연이 가라앉았다. 바람이 부는 날엔, 뿌연 부유물 위로 가끔의 추억이 떠오른다. 뜨거운 햇살. 전봇대 곁을 바람 삼아 자전거 몰던 아버지, 낮술에 취한 바퀴가 비틀거린다. 물에 씻기고 바람에 실려 갔지만, 어느 끝을 붙잡은 옛이야기가 늙어간다.
모든 상념을 묻었지만, 미처 가라앉지 않은, 떠도는 속삭임이 있다. 한낮 햇살이 뜨거울 때면, 눈이 시린 핑계로 눈물이 난다. 저기 어딘가에선, 친구의 반가운 손짓.
물 위에 비추던 그의 얼굴. 조용히 물결 같은 목소리다. 남들처럼 욕지거리도, 짓궂은 시늉도 하련만, 언제나 점잖았던 그의 몸짓. 괜한 푸념이 솟구친다. 함부로 내뱉는 말이 더 고소한 데, 우리는 그냥 물결이었다. 어느 날인가 그의 일상이 그 아래로 하강하던 날.
IMF로 직장을 떠났어도, 먹이를 좇아 신음을 뱉어도, 언제나 살랑이는 물살로만 남던 그.
아! 그는 끝내 자취도 없는 동네 어귀를 찾아 나선 걸까?
“이봐, 우리가 나중에 찾자고 묻어 놨던 구슬이며 딱지가 여기 있잖아!”
어린 시절의 그가 웃으며 가리키는 한쪽. 나도 나이가 들었나 보다.
비가 오는 날엔 호수에 가고 싶다. 허리가 굽은 아버지가 몰던 자전거, 막걸리 한 병에 판을 벌인 동네. 아주머니들의 깔깔거리던 웃음 위로, 10원짜리 동전 냄새가 가만히 떠오르는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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