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를 잃는다. 둘을 다 잃는 것보다는 낫고 두 개를 모두 얻는 것에 비해서는 못하다. 물론 모두를 다 잃더라도 무엇 하나만 건지면 최상으로 되는 것도 있고, 하나에 집착하다가도 차라리 모두 놓아버리는 것이 더 나을 때도 있다. 어떤 것을 획득하느냐는 지극히 주관적인 데다가, 그것을 계산식에 넣어 면밀히 득실을 따지기 힘든 경우도 많다. 그래서 어떤 선택이나 결단은 사전에 굳어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사후에 정당성을 얻는 게 많기도 하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은 분명 이것도 괜찮고 저것도 훌륭하다는 결론과는 다르다. 실제 일이 벌어졌을 때야 비로소 '그래 잘됐어! 이런 정도면 꽤 나은 선택이었어.' 하는 자기 위안으로 돌아서는 것이다. 세상 일에 처음부터 멋진 결심을 보여주는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오죽하면 좋은 일에 흥분하지 말고 혹여나 나쁜 일이 벌어질 것을 우려하는 호사다마라는 성어가 생겼겠는가?
그럼에도 이건 인력으로 어찌되는 게 아니다. 참으로 설명할 수 없는 자연의 균형이 작동하는 느낌이다.
그런 신비주의에 입각할 것은 아니지만, 세계는 오직 한 방면으로만 내달리지 않게 희한한 균형이 작동하는 것 같은 이 묘함. 그러면 다음엔 확률상 다시 좋은 일이 생기고 또...
변증법 같은 머리 터지는 이론을 들먹이지 않아도 세상은 대칭, 모순이 반복되는 것이다. 인간의 오만함에 대한 예비적 경고이기도 하고, 불완전한 행위 결과에 관한 조정이기도 할 것이다. 여기에 도덕적 판단이 개입하는 것은, 변명의 한 방편이기도 할 것이다.
'저 사람에게 못된 소리를 해서 벌 받는 것인가?' 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이는 도덕적 행위를 권장하기 위한 방편이다. 충분히 수용할 만한 태도이지만, 본질적으로 근거는 박약한 것 같다. 다만, 세상사의 균형을 향한 알 수 없는 힘이 작동하는 하나의 요인으로 보이기는 한다. 동양의 신비주의가 가미된 것 같은 양자 얽힘 같은 게 이 현실계에서 작동하는 느낌.
참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어쨌든, 별 잘못한 것도 없는 데 자꾸 신경쓰이게 하는 일이 빚어진 것에 은근히 화가 난다. 이후엔 뭐 대단히 좋은 일을 가져다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