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106 거울(4) 4. 흩어지는 세계 우린 학력고사라는 입시를 치렀다. 나는 백경 덕분에 수학에서 선방할 수 있었다. 우스꽝스럽게도, 가장 약한 과목 덕택에 입학 우수자가 된 것이다. 백경 녀석도 서울의 명문대로 진학했다. 입학과 더불어 학내는 시위로 시끄러웠다. 빈 시간이면 우리는 시국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면서도 사복형사의 첩보 활동에, 목소리를 낮추곤 하는 것이다. 나도 시위에 몇 번 가담해 봤지만, 친한 녀석 하나가 곤욕을 치른 후로는 몸을 사리게 됐다. 온 몸을 던지는 학우들도 있는 데, 그저 속으로만 응원한다는 비겁은 내내 무거운 변명으로 남았다, 입대는 현실 도피처가 되었지만, 복학 후에는 진로가 다시 목을 죄기 시작했다. 고시 공부를 걷어치운 후, 9월쯤 되니 각자는 길을 찾아가고, 나도 그 속에 끼게 되.. 2024. 9. 30. 거울(3) 3. 부유하는 경계선 어언 듯 고3이다. 우린 매일을 허덕이면서도 바깥은 잘 모른다. 대통령 피살 이후 신군부가 어떠니 하면서 시끄럽기만 하다. 하지만 우린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역사의 전환점에서도, 꼼짝없는 구경꾼 신세일 뿐이다. 광주에서는 큰일이 벌어졌음에도, 언론은 통제됐다. 계엄군이 임산부 배를 갈라 죽였다는 둥, 흉문만 떠돌 뿐이다. 선량한 시민들을 반란 집단으로 내모는 것이 신군부의 유일한 공식 입장이었다. 시위는 격해지고, 광주에서의 참극 영상물도 떠돌았다. 하지만 신군부는 무정부 상태 조작에 더 열을 올렸다. 그리고는 시민군의 최후 항전이 끝나고 세상은 역사를 얼른 파묻는 듯했다. 신군부는 간교한 정책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80년 여름은 유난히 더운 것 같았다. 방학이지만 모두 등교한지라.. 2024. 9. 29. 거울(2) 2. 구경 당하는 존재 입시 중심이라 예체능은 형식적으로 편성되어 있다. 대신에 그 시간은 자율 학습으로 운영하는 것이다. 그래도 미술 선생은 자기 일에는 꽤나 자부심을 가진 듯하다. 시 미술협회 간사일 만큼 활동적이기도 하다. 그의 시간이 되면 그는 가끔씩 회화의 매력을 들려주곤 한다. 그럴 때면 그의 눈은 열정적으로 반짝인다. 시대 상황이 예체능 과목을 이단시하며 경계 밖으로 밀어내고 있다. 밥 굶기 딱 알맞은 종목에다가, 산업시대에 투입될 노동력이 마치 생산성없이 빈둥대는 것처럼 여겨져 유한 계급으로 낙인되고 있다. 보다는, 기성의 잘 짜인 그물망속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물고기는 그물 밖으로 빠져 나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것이다. 이들은 분류상 더 어리석은 물고기류이지만, 바깥에서 그물을 찢으려.. 2024. 9. 28. 거울(1) 1. 파도가 덮친 날 콘테 모나스 선생은 파도같은 사람이다. 권위적이며 성질도 뾰족하다. 마치 남미계처럼 까만 피부에 곱슬머리, 호리호리한 몸매에 광대뼈가 블거져 나와 있다. 그런 그의 성격과 생김새를 따라 애들은 절묘하게 별명을 갖다 붙였다. 성질이 모난 꼰대, 콘테 모나스!우린 그의 풍랑에 다듬어진다. 그는 한 번 화가 나면 바닷속까지 엎을 기세를 보인다. 그는 수시로 그의 젊어 한때 무용담을 늘어놓기도 한다. 그러면서 그의 청춘은 파란만장한 대서사였지만, 우리에게는 똑바로 살아야 한다고 주문한다. 그런 연유일까? 전교의 문제아는 죄다 우리 반에 다 구겨 넣은 형국이다. 소위 학교의 수상, 좌상이란 애들이 우리 반에 다 포진하고 있는 것이다. 한 녀석은 주먹 하나가 보통 애들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2024. 9. 27.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 최은영 어떤 빛일까? 작가의 빛은 어떤 것일까?단지 특정 부분만 비추는 집중 조명일 수도 있고, 날씨가 흐린 탓에, 전체를 다 비추지만, 광도가 낮아 희미하게 비치는 경우일 수도 있다. 혹은 사위를 다 밝히지만, 너무 강해, 오히려 주변을 온통 fade out 처리한 것 같은 빛일 수도 있다. 하이라이트같이 한 부분만 조명하는 것은 무대의 연기자들만 비추고 부속 장치를 보이지 않게 하듯이, 다른 사물과 사태를 삭제해 버린다. 이에 대해 그것이 ‘여린’ 희망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그것은 희미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엄청 밝은 것이다. 탄광에 매몰되어 갇힌 광부에게 무너진 돌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은 생명줄이다. 그것에 의존해 목숨을 구하는 굵은 동아줄 같은 것이다. 그러나 너무 강한 빛은 역설적으로 시력을 차단해.. 2024. 9. 24. 환상 횡단 정말 그러하다. 현실이 가상과 어떤 차이를 갖고 있는지가 의문스럽다. 지젝이 말하듯이 9.11로 뉴욕 심장부가 무너져 내린 것은 스펙터클한 영화의 한 장면이다. 그래서 그는 그 사태를 실재의 도래라는 전통적인 해석보다는, 이미지가 현실에 들이닥친 것이라 말한다. 영화에서나 봄직한 일이 현실에서 벌어지니, 그 구분에 혼란을 겪는 것이다. 환상의 횡단이라 하면 그것을 벗어나라는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자유주의의 환상이 실현되는 꼴이다. 그래서 그 이면을 보면 '악의 축', '선의 회복' 같은 게 거짓된 슬로건이 된다. 자본주의가 애초 품고 있던 모순이 극한점에 이르러 폭발한 것이란 측면이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해마다 광복절이 되면 우리의 잠자고 있던 분노를 터뜨린다. 우리는 그 아픔을 잊으려고 하지만 그들은 애.. 2024. 9. 6. 플라멩코 추는 남자-허태연 1. 줄거리 산업시대를 억척스럽고 고집스럽게 살아온 67세 남훈은 굴착기 기사이다. 44살 때 늦깎이 딸을 얻은 그는 41세 때 ‘청년 일지’라는 버킷리스트를 작성해 둔 상태이다. 일흔에 가까운 시기에 은퇴를 다짐한 그는 그 노트를 펼쳐 들고 과거에 자신이 작성한 미래 계획을 확인한다. 그것을 계기로 그는, ‘새로운 언어 형식이 새로운 관계를 만든다’라는 생각과 함께 스페인어와 플라멩코를 배우게 된다.그것을 자신이 ‘똑바로 설 공간’을 만드는 것으로 여긴 것이다.그는 그 메모에 기록된 희망 사항을 하나씩 실행해 가면서 가장 아픈 손가락, 전처소생의 딸 보연을 만나며 스페인으로 함께 여행을 떠난다. 딸과의 화해를 이루게 되는 그는, 세비야의 스페인 광장에서 플라멩코를 추면서 인간에 대한 사랑이 가장 중요.. 2024. 8. 27. 감정이 있는 심연 - 한무숙 “심연은 '깊은 연못','물속 깊은 곳'이라는 뜻으로,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어서 도저히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은 막막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나무위키]따라서 ‘감정이 있는 심연’은 마음속 깊은 곳의 알 수 없는 것으로 부터의 알 수 없는 감정을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사람 마음속은 그만큼 깊고 깊어 아무리 들여 다 보아도 제대로 알 길이 없다. 그러니 외현하는 것만으로는 심중을 모두 읽을 수는 없다. 다만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내면의 참뜻을 간접적으로 비추는 그림자이기는 하다. 그것이 하늘 한가운데 해가 떠 있어 짧게 보이든, 사선에 머물러 길게 보이든 심연에서 솟아 나오는 마음은 그 어느 쯤에 있을 것이다. .. 2024. 8. 26. 제대로 존재하기 오늘날은 자본주의가 세계를 압도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것은 18세기 자유주의 이념과 잘 결합해 전 세계를 지구촌이라는 일자로 묶고 있다. 이는 국가라는 귀찮은 존재를 제거하고 자본이 그 충실성을 수행하는 데 아주 적합하다. 이미 국가나 사회는 해체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보면, 다음에는 무엇이 올까?철저한 개인주의를 지향하는 것도 이에 전혀 다름이 아니다. 추상적 타협으로 맺어진 것이 국가나 사회이고 보면, 그 장치들은 개인 뒤에 숨는 게 마땅할 것이다. 그러면 국가나 집단은 어디서 형체를 유지할 것인가? 사회적 혼란, 국가적 위험이 나타날 때만 비로소 그존재를 드러낼 수 있다. 말하자면, 국가가 있어 위험이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위험이 있어야 비로소 국가가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니 위험한 생각이.. 2024. 8. 13. 곁에, 조그맣게 올해 봄에 인근 동산에서 춘란 한 촉을 캤다. 푸르죽죽한 민무늬라 별 볼일 없는 종이지만, 꽃 대가 둘 달려있어 꽃이라도 볼 요량으로 집에 다 옮겨왔다.(아, 소유가 아닌, 존재로서의 삶은 실패!) 거기에다가 난화분도 아니고 일반 화분에 대충 심어서 현관문 탁자에 뒀다. 그런데 꽃은 개화도 허지 못한 채 그 상태로 봄은 지나버렸다. 그저 그런 난초라 별 관심 없이 지냈는 데 어느 날 보니 잎 한 장에서 무늬가 보인다. "어, 전혀 모르고 가져왔는 데 변이종 기질이 나타나다니!"그럼으로써 갑자기 욕심이 생겨버렸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옆의 난들도 살펴보면 미처 못봤던 것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여름이라 폴이 무성해 잘 식별할 수가 없을 테니, 주변이 정리되는 가을이나 겨울에 한 번 올라가리라 생각하고.. 2024. 8. 11. 이전 1 2 3 4 5 6 7 ··· 11 다음